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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루의 포도나무(윤운성) 글쓴이 : KEEC   2012-08-25 10:15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는

신이 심어놓은 한 그루의 포도나무이다.

함께 일 할 때 그들은 전체를 이룬다.

홀로 있을 때 그들은 분리되어 있으며 불완전하다.

지금처럼 존재할 때 그들은

두려움과 갈등, 싸움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의 문은 서로에게 닫혀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함께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중간에서 만나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완성하고 전체를 이루려면 서로가 필요하다.

세상은 하나

우주도 하나

신도 하나

나는 하나에 연결되어 있다.

지금 이 순간은 영원을 가는 입구이다.

이 순간은 여기에 있다.

여기는 현존하는 전체의 일부이다.

기독교인이 되기보다는 그리스도가 되라.

불교인이 되기보다는 붓다가 되라.

그러면 영원(통합)으로 이를 것이다
에니어그램과 영성(영성추구자) 글쓴이 : KEEC   2012-08-25 10:14

에니어그램과 영성


에니어그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최근에 관련 서적이 출판되기 시작한 것은 늦은 감 이 있으나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에니어그램의 스승들이 옛부터 경계하던 것들은 에니어그램의 본질을 깨닫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형론을 통하여 본질에 대한 접근이 중요하다.
에니어그램을 현대 사회에 전수하기 시작한 구지예프(Georges Ivanovich Gurdjieff, 1866-1949)는 영적 지도자로서 성격 또는 인성(personality)을 발견하거 나 파악하는 것이 목표가 아님을 명백히 가르쳤다. 흔히 성격이란 말로 이해하는 것을 그는 세분화 시켜서 거짓 인성(false personality)과 참된 인성(true personality), 그리고 본성 (Essence)을 찾기 위해 영성 수련을 하는 수련인생(work personality)등으로 나누었다. 따라서 영성수련을 통하여 사람은 본래적 존재(authentic being)로서 참된 나를 찾아 나가야 하 는데, 여기서 또한 나를 세분화 시키는데 여기에는 다섯 단계의 수준이 있다고 본다.
그 첫째는, 보통 상태에 있는 사람으로써 수많은 나 (Many I's), 둘째는 관찰하는 나 (Observing I), 셋째는 기계적 삶에 저항하여 수련하는 나(Deputy steward), 넷째는 모든 나 를 통제하는 나 (Steward), 그리고 다섯째는 영구적인 나로서 참된 나 (Real I)이다. 이와 같은 구분을 다른 개념으로 말하자면 의식상태의 네 단계나 인간의 일곱 수준으로 나 누는데, 그 단계의 첫째는, 잠자는 상태, 둘째는 선잠 깬 상태, 셋째는 자기를 의식하는 상태 (Self-consciousness), 넷째는 객관적 세계를 의식하는 상태 (Objective consciousness)로 서 술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잠자는 상태에 있다. 이 때의 사람들은 기계적인 삶을 살거 나 환경이나 외부조건에 의하여 떠밀려 가거나 저항하며 살아갑니다. 본능을 따라 살기를 잘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장 과정에서 얻은 습관이나 인상이나 학습 등의 축적으로 형성된 성격에 맞춰서 살아간다. 이런 상태의 사람을 일컬어 "불난 집에서 자는 사람" 이라든가 " 자기라는 감옥에 갇힌 포로"라고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사람은 태어나서 만 세 살 때가 절정이고, 그 이후로는 내리막길이다."(David Kossoff)라는 말이 있다. 나서 세 살 때까지는 본성이 크게 뒤틀리지 않고 살다가 그 이후로는 가족이나 주위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기 방어와 보존의 본능이 작용하면서 성격이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되는 성격이 만 여섯 살이 되면서 확정된다. 그 뒤로는 죽을 때까지 그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 다만, 주어진 성격 안에서 건강해지느냐 불건강해지느냐, 즉 통합의 상태로 가느냐 퇴화 내지는 퇴행 상태로 가느냐 하는 변화가 있을 따름이다.
둘째로 선잠 깬 상태(half-asleep / half-awake)는 자신이 잠자는 상태를 느끼는 것으로서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이런 상태로 살아간다. 상상의 세계로 빠지면서 현실 도피를 하 거나 모르는 것이나 알 수 없는 것을 말하며 거짓말을 곧 잘 하고, 되지도 않을 것과 자신 을 동일시하며 살아간다.
셋째로, 자기를 의식하는 상태는 보통 극히 위험한 상황이나 극단 적인 감정 (예를 들자면, 비탄) 상태에서 생긴다.
넷째는, 객관적 의식의 상태이다. 극히 드 믄 경우라 할 수 있는 이 상태의 경우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진실을 꿰뚫어 본다. 우주적 의식이고도 하고 신적인 의식이라고도 표현되는 경우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사람의 일곱 단계를 생각하게 된다. 1번 단계의 사람은 본능 중심으 로 생각한다. 물리적인 사람이다. 2번 단계의 사람은 감성 중심으로 생각한다. 감성적인 사 람이다. 3번 단계의 사람은 지성 중심으로 생각한다. 지성적인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 가지 범주에 속한다. 4번 단계의 사람은 균형 잡힌 중심을 가지 고 산다. 5번 단계의 사람은 수정같이 명료화된 본성을 지닌다. 고등 감성 중심 (higher emotional center)과 영구적 나를 지니게 된다. 6번 단계의 사람은 5번 단계의 인간이 지닌 모든 자질에 덧붙여서 고등 지성 중심(higher intellectual center)과 객관적 의식을 지닌다. 초인적 힘을 발휘하는 유형이다. 7번 단계의 사람은 6번 단계의 사람이 갖는 모든 것 외에 모든 의식의 상태를 통제한다.
이와 같은 인간 이해를 전제로 하고 에니어그램을 말하자면, 흔히 말하는 인간의 성격을 파악하거나 개발하는데서 그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의식 수준에 있어서 잠자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또는 포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성격 발달을 논해봐야, 여전히 잠자는 상태나 포로 상태 안에서 헤맬 수 밖에 없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에니어그램은 성격심리학(personality psychology)의 범주로부터 영성 심리학(spritual psychology)의 체계로 연결된다. 따라서 에니어그래을 심리학과 영성을 잇는 다리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궁극적으로는 하 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마땅하다.
구지예프(Georges Ivanovich Gurdjieff)는 일찍이 말하였다. "모든 사람은 목표를 세워야 한다." 물론 이 목표는 본성을 회복하는 것을 말함이요, 그의 가르침으로 설명하자면, 객관 적 의식의 상태를 지향하며, 적어도 6번 단계 사람의 수준을 바라보며 영성 수련을 해야 할 것이다. 이 목표를 향해 감에 있어서 "의식적 노력" (conscious effort)과 "자발적 고난"(사서 고생하는 것 ; Voluntary Suffering)이 필요하기에 이를 꼭 배워야 함을 그는 역설한다.
영성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free gift of Grace)을 믿고 살지만 우리 의 몸부림치는 노력 즉 분투노력 (committed struggle)이 동시에 필요하다.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분투노력과 자발적 고난을 배우며 수행해 나 갈 때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영성 신학에서 말하는 분별과 결단의 배합 (combination of discernment and commitment)이라 할 수 있다.
의식적 노력과 함께 요청되는 것이 의지이다. 자기 자신을 바로 알고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 가 필요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세계를 알아야 한다. 따라서 에니어그램을 좁은 의미에서 성격 유형을 알거나, 세계에 대한 이해나 지식은 그대로 있으면서 성격을 개발 한다는 것은 타당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인간의 내적 개발을 추구해야 하는데 이는 지식과 존재가 동시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지식과 존재는 서로의 성장을 돕습 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앞지르거나 압도하면 내적 개발은 얼마 안 가서 멈추고 만다. 자기 지식(self-knowledge)을 위하여 자기를 공부하며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마 찬가지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위하여 세계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전체와 연결됨 없이 부분을 아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무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를 알기 위해서는 세계를 알아야 한다. 비록 완전히 아는 것은 아닐지라도, 현재 내가 아는 것은 부분적인 것일 뿐, 전체와의 연관 속에서 아는 온전한 지식을 향하여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옛부터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들어왔다. 학교에서 이 말을 들었을 때부터, 그것이 좋은 말인 줄은 알았으나, 어떻게 해야 자신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세히 가르쳐 준 일이 없다. 이는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사는 주체는 나요, 내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분명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을 잘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도 세계도 잘 모르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 다.

내가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세계에 대해서는 더욱 더 부족하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흔히 생각하고 말하기를,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자유와 건강"을 말한다. 그러나 내가 내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행복을 원하면서도, 실제로 불행을 자초하거나 있던 행복마저 깨거나 쫓 아 버리는 일을 곧 잘한다. 마찬가지로 자유를 원하면서도, 스스로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공포나 욕망이 나 불안 때문에 부자유해지는 경우가 다른 어떤 물리적 제약 때문에 당하는 부자유보다 더욱 심한 경우 가 많다. 이토록 우리가 원하는 선은 이루지 못하고, 바라지 않는 악이나 불행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인생 을 살면서도 우리는 대개 그대로 넘어간다. 그러면서 그런 불편이나 불행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경향 이 많다. 아니면, 그런 것 일일이 다 생각하기가 골치 아프니까 잊어버리고 살려는 듯이 쾌락에 빠지거 나 물질적 충족감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인간의 본성을 되찾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영성을 말하기 이전에라도, 인생을 기쁨과 보람 으로 조화된 상태에서 누리기를 원한다하면, 나 자신을 알고, 세계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알기 위해서 는, 우리가 모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의식을 깨우기 위해서는 우리가 잠을 자고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온전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더욱이 영성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함을 말하면서도 현재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 가를 알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앞으로 어떤 상태를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 나가야 하는 가를 모르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영성의 중요성은 알지만 영성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지 또는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 그리고 나아가서는 어떻게 온전함에 이르도록 성숙시켜야 하는가는 모르면서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에니어그램 영성을 추구하는 목표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길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요,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섭리와 의지대로 인간의 본성을 되찾는 것이다.

성서적 관점에서 볼 때, 영성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하나님 체험"을 말 로나 행동으로 표현하고, 그 표현을 성숙시키는 삶의 길을 가리킨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이미지 를 회복하며 살아야 할 사람으로서, 성령 안에서 변화와 성숙의 과정을 거치며 "그리스도의 완전"에 이 르기까지 온전함을 지향하는 삶을 두고 영성이란 말을 쓸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하여는 넓은 의미에서 영성수련이 필요하며 영성지도가 큰 도움이 된다.

영성신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형성되어야 하듯이, 그 신자 안 에서 그리스도가 형성되어야 한다. 교회력을 따라 살 때, 그리스도 예수가 성탄절에 탄생하여 현현절에 세례와 봉헌을 거쳐 세상 가운데 나타나고, 그 이후 공생활을 하시고, 사순절에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 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시는 모든 과정이 신자의 내면에서부터 구체적인 삶에 이르기까지 재현되 며 재형성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영적 형성을 포괄적으로 표현하여 영성이란 말을 쓸 수 있다. 따라서 크리스챤의 신앙과 생활양식이 통전적으로 다듬어져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며,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의 삶을 민감 하게 의식하며 성실하게 실존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괄적으로 말해서 영성이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를 통전적으로 닮아가기 위한 모든 노력과 현실 속에서 이어지는 그와 같은 의식적인 노력과 자발적 고 난을 포함하여 온전함의 영성이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온전함의 영성 또는 통전적 영성을 지향하며 에니어그램을 배우는 것이 필요한 것이 다. 에니어그램은 영성심리학의 체계로서 이해하고 배워야 한다. 영성적 차원에서 에니어그램은 인성을 깊이 이해하며,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인성 유형을 바르게 알고, 인격 완성에 이르는 데 도움을 준다. 에니어그램은 많은 책을 통하여 기초적 이해를 도모할 수 있기에 여기서는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느끼 지 않는다. 다만 영성을 가꾸어 나가는 데 필요한 만큼만 설명하기로 한다. 에니어그램은 헬라어 "에네아스"(enneas) 즉 아홉과 "그람"(grama) 즉 '기록'이란 말의 합성어이다. 구지예프(Georges Ivanovich Gurdjieff)에 의하면 우주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포괄적 상징이다. 그는 "넓 게 말해서 에니어그램은 우주적 상징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든 지식이 에니어그램에 포함될 수 있고, 에니어그램의 도움을 받아서 그 모든 지식이 해석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다루는 에니어그램은 나 자신을 알고 세계를 아는 것, 즉 자기지식과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초점을 맞추어서 이해한다. 특히, 인성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에니어그램은 사람의 성격을 아홉가지로 나눈다. 인성 유형은 오직 아홉 가지가 있을 따름이다. 누구라도 그 아홉가지 유형 가운데 하나에 해당된다.
에니어그램은 오랜 역사를 지닌 동방의 지혜로서 인간의 상황과 인성 유형을 어떤 이론이나 체계보다 도 정확히 표현해 줄 뿐 만 아니라 자아를 발견하고 인격을 완성시키는 데 더 할 수 없는 큰 도움을 준 다.
에니어그램을 두고 "자기 발견의 여행"이라든가 " 자기 발견의 지혜"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에니 어그램의 기본과정을 세 단계로 말하자면, 첫째, 자신의 강박 충동(compulsion; 협박)을 발견하고, 둘째 그 원인을 깨닫고, 셋째, 강박 충동을 극복하는 것이다.

에니어그램이 드러내 주는 핵심은 타고 난 은사나 장점을 오용 내지 남용하면 그것이 곧 단점으로, 그리고 강박 충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죄가 그렇듯이 강박충동 역시 이기적인 것이기 때문에 에니 어그램의 여로를 시작할 때, 우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하려는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 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일단 문제를 정확히 발견하면, 강박충동을 따를 것인가 안 따를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며, 나아가서는 바른 선택으로써 자유인으로 성숙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에니어그램을 터득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바라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좌절하는가를 점 차 알게 된다. 우리의 깨달음을 방해하고, 에너지를 가로 막고, 마음속에 무엇이 공포심을 넣어주고, 무 엇이 마음을 마비시키는지, 그래서 어떻게 우리가 자동적으로 또는 기계적으로 강박충동에 의하여 반작 용을 일으키는지를 알게 된다. 따라서 에니어그램의 지혜가 성숙되면 될수록 자기발견과 자기의식이 성 숙된다. 결국 에니어그램은 자유에 관한 지혜이며 철학 일 뿐 아니라 진정한 자유와 건강한 행복을 얻 을 수 있는 통전적 영성의 길이다.
8유형의 신성한 생각은 순수입니다 [윤운성] 글쓴이 : KEEC   2012-08-06 15:14

8유형의 신성한 생각은 순수입니다.
 
 
8유형의 악덕은 과도한 욕망이고 미덕은 진실입니다.
집착은 복수이며 신성한 생각은 순수입니다.

순수 / 순진

깨끗하고 투명한 유리잔 두 개가 있습니다.
한 잔에는 맑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고,
다른 한 잔은 비워져 있습니다.

전자는"순수"라는 것이요,
후자는"순진"이라는 것이죠.

순수라는 놈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어
더 이상 들어갈 틈이 없으니,깨끗함 그 자체이고요.
순진은 비어 있으므로,그안에 순수처럼 깨끗한 물이
담길 수도있고,더러운 물이 들어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누군가가"순수"와"순진"의 차이를 묻더군요.
순수의 사전적 의미는"잡것의 섞임이 없는 것"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순진"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꾸밈이 없이 순박하고 참되다"
세상 물정에 어두워 어수룩함 입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됩니다.

살아가면서"순진하다"라는
말은 어리석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반면 "순수하다"
라는 말은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소신이 있고,
주관이 뚜렷하다는 것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순진"이란 말은 어릴 때만 간직할 수 있는 말입니다.
어른이 되어도 순진하다면 세상을 모르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반면 순수는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순수한 사람이 있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거짓이 없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자기 말에 책임을 집니다.
순수한 사람은 주관이 뚜렷합니다.
순수한 사람은 어떤 상황이든 흔들리지 않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겸손의 미덕을 갖고 있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남의 잘못은 용서하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합니다.

순수하게 살아간다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좋은 습관을 가지려 노력하면 순수해질 수 있습니다.
진정 순수해 누가 봐도 아름다워서
나를 닮고 싶어하는 사람 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봐도 아름답고,누가 봐도 부담이 없는,
순수를 사랑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