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급받은 인증코드를 입력해주세요.
개인이 검사를 구입해 진행하시려면 다음 링크를 클릭하세요!
온라인 검사 구입 및 검사시험(考試) - 양재오 글쓴이 : KEEC 2012-08-27 13:09 |
시험(考試) 글. 리쟈통(李家同) / 번역. 양재오 내일 은퇴하는 제가 이 글을 전국 초중고등학교에서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들께 드립니다. 삼십오 년 동안 고등학교 교사로 봉직한 내 스스로 생각할 때, 나름대로 한평생 충실하고 매우 뜻있게 살아왔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내가 고등학교 교사로 첫걸음을 내딛던 첫 해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뒤, 나는 꽤 이름이 있는 고등학교에 수학교사로 부임했습니다. 그 가운데 내가 맡은 학생들은 모두 엄격히 선발된 출중한 학생들로 우수 반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소수를 제외하고 전반적으로 열심히 수업에 임하고 성적이 좋아서 가르치기가 무척 수월했지요. 내가 임의로 어떤 문제를 출제해도 그들은 시험을 잘 보았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한 학급에서 수업하는 도중, 수업에 전혀 마음을 두지 않는 한 학생이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늘 천장을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수학 중간고사 성적은 고작 15점에 불과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온 반 급우 가운데 그 학생만 낙제했고, 성적도 이처럼 무척 저조하게 나온 것입니다. 나는 하루 날을 잡아, 방과 후 그와 얘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이 학생은 자신의 성적이 대폭 하락한 것을 짐짓 모른 채 하더군요. 그는 왜 성적이 떨어졌는지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가 하는 말인즉 수업 시간에 내 강의 내용을 못알아 듣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학부형을 찾아가 얘기를 좀 해야겠다고 겁을 좀 주었더랬지요. 그는 내 말을 듣더니 곧바로 긴장하며, 자기 아버지는 병환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때 자기는 다섯 살이었고, 또 어머니는 재혼한 뒤 자기를 버려두고 미국으로 갔다고 하더군요. 그 뒤 그는 자기 할머니와 함께 사는데, 집안 경제 사정은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머니가 연세가 많으신 데다 국어(만다린)를 잘 못하시고, 글자도 모른다고 하며, 할머니가 만일 자신의 성적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무척 상심할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내게 강요받는 느낌을 받은 그가 갑자기 묻더군요.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속인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문제를 만들어 놓고는 마치 그 문제를 못 푸는 척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말을 들은 나는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다음부터는 좀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와 함께, 그를 위해 방과 후 수학 복습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 날 저녁부터 그 약속을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이 학생은 여전히 뻣뻣하여 내가 그를 위해 하는 일을 흔쾌히 받아들이질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처음 약속을 견지했고, 그는 저녁에 그저 얌전히 내 지도에 따라 연습문제를 풀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그가 실제로 열등하지 않고, 다만 수리에 대한 반응이 좀 늦을 뿐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지만 매 주간 저녁 두 차례에 걸쳐 복습을 하면서, 마침내 학습 진도를 따라갈 정도가 되었고, 시험 성적도 갈수록 향상되었습니다. 그 뒤 두 달이 지나고 나서 나는 더 이상 그 학생의 보충수업을 돕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뒤 이 학생은 나와 친해졌습니다. 그 때 우리 부부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아내는 그 아이가 부모가 없다는 것을 안 뒤, 그를 불러 식사도 함께 하고, 그 아이는 무슨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와 상의도 하였는데, 게 중에는 인생계획 같은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대학 입학시험도 순조롭게 치르고, 청공링(成功嶺)에 가기 전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러왔습니다. 그러나 그 뒤 사흘째 되는 날 나는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 나를 무척 놀라게 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한 차례 속인 일이 있는데, 삼가 용서를 청합니다. 그 때 제 성적이 갑자기 크게 떨어졌는데, 그것은 제가 일부러 그랬던 것입니다. 저는 줄곧 아버지 없이 지냈고, 그 때문에 아버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면 제게 무슨 문제가 있을 때, 쉽게 물어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한 가지 생각을 해냈습니다. 영어 선생님, 국어 선생님, 수학 선생님이 모두 남자 선생님이기 때문에, 그 분들 앞에서 수업을 잘 못하는 학생으로 가장해서, 그 분들의 반응이 어떤가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영어 선생님은 내 성적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시험지 답안을 내게 되돌려 줄 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습니다. 국어 선생님은 나를 크게 꾸중했는데, 당신이 제일 미워하는 것은 공부 안하는 학생이라며, 벌로 한 시간 동안 서있게 했습니다. 제가 비록 고등학교 1학년생일지라도 키가 큰 편이어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벌로 서서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다 컸는데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당해야 하니 당연히 기분이 무척 좋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적벽부(赤壁賦)를 한 자도 외우지 못했는데, 국어 선생님은 내가 시험문제를 백지로 제출한 것을 보고 나서, 곧바로 나에게 벌을 세웠습니다. 그 뒤 수업이 끝날 때 그는 온 반 학생들에게 당신이 나를 포기했다고 선언해버렸습니다. 저에게 관심을 보여준 유일한 사람은 바로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사정을 물어볼 뿐만 아니라, 제 보충수업을 친히 도와주셨습니다. 사실 선생님이 제게 관심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무료로 제 가정교사 노릇까지 해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 때 저는 정말 모르는 것처럼 가장해야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무려 두 달이 지난 뒤, 마침내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부터 저는 제가 연기를 잘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제일 감동한 사람은 사모님이십니다. 사모님께서 제게 보여주신 관심을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사모님은 저를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하도록 한 첫 번째 분입니다. 그 때 마침 추운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일부러 점퍼를 입지 않았습니다. 사모님은 제가 입은 얇은 옷을 보시더니, 곧바로 저를 억지로 데리고 겨울옷 파는 가게로 가서, 저를 위해 두터운 점퍼를 하나 사주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월급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아는데, 저에게 그토록 잘 대해주셨습니다. 그 때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선생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무슨 일이 있을 때면 늘 선생님께 여쭙기도 하고 상의를 했던 것입니다. 그 때 마다 선생님은 제게 적절한 의견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저는 암암리에 선생님에게서 사람노릇 하는 것과 일처리 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선생님은 사람을 성실히 대해주셨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성실히 사람들을 대하려고 합니다. 선생님은 이 모든 것을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선생님께 용서를 청합니다. 그 때 선생님을 속인 것은 정말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정말로 좋은 아버지가 필요했었습니다. 다행히 선생님은 저를 잘 돌봐주셨고, 그래서 그 때부터 무슨 일이 있으면 상의를 드릴 사람이 생겼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제 성적이 좋지 않았을 때, 저를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제 일생에 제일 큰 영향을 주신 분입니다. 그럼 평안하시길 삼기 기원합니다. 선생님을 속인 장 아무개 드림 그런데 이 편지를 보고 나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우리 선생님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생들을 시험(테스트)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학생들도 우리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그 학생은 저에게 시험문제를 하나 출제했고, 저는 분명히 그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나는 그 뒤 특별히 내가 맡는 열등 반 학생들에게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들의 자질이나 소질이 어떠한지 불문하고, 나는 그들에게 경솔하게 말하거나 대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늘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도와서, 그들이 배울수 있는 만큼 충분히 배우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 동안, 나는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을 몇 명이나 가르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학생들은 대기만성하여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학업성취의 정도가 어떠했든지, 그들 모두 사회에서 각기 자기 분야에서 열심이 하여, 한 사람도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모든 학생들의 성취도가 모두 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정도는 아니라고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난날 내가 가르친 학생들을 회고할 때 스스로 감개무량해집니다. 그들의 성취의 정도가 어떠했든 그들로 인해서 나는 어느 정도 성취감을 느낍니다. 내일 내가 지난날 가르친 학생들이 내 은퇴를 위해 마련된 자리에 참석할 것입니다. 아마 그들 대부분은 당시 열등반 학생들일 것입니다. 당시 나를 속인 그 학생도 물론 참석할 것입니다. 그의 사업은 성공했고, 줄곧 나와 연락을 유지하고 있지요. 내일 그를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야겠습니다. 그는 내 일생을 바꾸었고, 그는 내 일생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입니다. * 이 글의 원문은 李家同의 考試이다 http://blog.dreamwiz.com/bonojoy/13465388 |
나는 나다(我是我) - 양재오 글쓴이 : KEEC 2012-08-27 13:09 |
나는 나다(我是我) 글. 리쟈통(李家同) / 번역. 양재오 돌이켜보니 내 어린 시절은 같은 또래의 독일 아이들 보다 훨씬 더 편안했던 것 같다. 나는 독일인으로 내 나이 다섯 살 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아버지는 소련에서 전사하였다. 내 나이 여섯 살 때는 하나 밖에 없는 형마저 전쟁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나와 어머니는 서로 의지하여 살아왔다. 그러나 전쟁 중에 이와 같은 일이 뭐 그리 대수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 가까운 이웃들도 거의 대부분 아버지를 여의었고, 설령 아버지나 형이 살아 있다고 해도, 그들 모두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다. 내가 여덟 살 때는 하루하루 지내기가 무척 어려웠다. 본래 필요한 물건은 가게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었는데, 갈수록 물건이 동이 나서 그때그때 필요한 물건을 사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기억한다. 한 번은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백화점에 갔는데, 백화점 안이 거의 텅텅 비어있었고, 심지어 장난감마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집은 정부로부터 특별한 보살핌을 받고 있었으니, 사흘마다 우리 집에 식품이 공급되었다. 이웃들은 이것을 무척 부러워했다. 그들은 우유와 고기를 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와 어머니는 우유와 고기가 부족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줄곧 쵸콜랫을 즐겨 먹을 수 있었다. 나는 내 이웃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카스텔라 같은 과자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 집은 몇일에 한 번씩 누군가 카스텔라를 보내주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당시 어머니는 음식거리를 장만하려고 시장에 갈 필요가 없었다. 내가 여섯 살 때 입학한 초등학교는 베를린에서 제일 좋은 초등학교였다. 매일 아침 군인이 차로 나를 태워 등교시켰고, 수업이 끝나면 역시 그가 와서 차로 나를 집에 데려다 주었다. 그 때 나는 비록 어리긴 했어도, 우리 형편이 매우 특수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어머니에게 정부가 무엇 때문에 우리를 특별히 보살펴주는가 하고 물었다. 어머니의 대답은 이랬다. “얘야, 넌 아버지와 형이 나라를 위해 희생한 것을 모르니? 정부는 당연히 우리를 보살펴야 할 책무가 있단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믿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것은 우리 반 급우도 아버지와 형을 잃었는데, 어째서 정부가 그들에게는 식품을 제공하지 않고, 또 등하교 때 군인 아저씨가 차로 그들을 태워다 주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시간이 얼마 지나고, 나중에 대포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렸다. 그 때 어머니는 나에게 슬그머니 언질을 주었다. 소련군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나에게 베를린의 모든 학교가 이미 문을 닫았다고 말해 주었다. 그렇지만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 교실의 절반은 여전히 사용할 수 있다. 나는 학교의 마지막 수업을 기억한다. 때 마침 소련군이 공습하여, 우리는 지하실로 대피하여 두 시간 머무르다 나왔는데, 주변이 모두 큰 불길에 휩싸였다. 우리는 더 이상 수업할 여지가 없이 가족들이 와서 집으로 데려갈 때까지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포성이 가까워질수록, 어머니는 더욱 초조해했다. 그 때 나는 아직 어려서 무엇이 무서운 것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거리에서 군인들이 이동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흥분하기 조차했다. 그렇지만 어린 내 눈에도 우리 독일 군이 패배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피곤하고 지쳐 보이는 군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무척 슬퍼졌다. 어느 날 오후, 어머니는 갑자기 나에게 거리가 유난히 너무 조용하고, 군인의 그림자조차 비치질 않는다고 말했다. 본래 우리 집 출입문 부근에는 언제나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가 보이질 않는다. 더욱 이상한 것은 포성도 멎었다는 것이다. 내가 어머니에게 어째서 대포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아마도 소련군이 곧 시내로 들어올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그늘 저녁 바깥이 유난히 조용하여 거의 정적에 잠긴 탓에, 나는 잠이 깊이 들었다. 아침 일찍 어머니가 나를 깨워서 일어났는데, 어머니는 내게 좋은 옷을 꺼내 입힌 뒤,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사의한 일을 나에게 시켰다. 그것은 내가 빨리 베를린을 떠나라는 것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큰 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되, 될수록 빨리 달려가라는 것이다. 내가 빨리 걸어가면 대략 두 시간 정도 걸려서 도시를 떠나 시골에 도착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시골에 도착하면 어느 집에서 나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한다. 덧붙여 어머니는 나를 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반드시 잊어버리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시며,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그 때 바깥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나는 이와 같은 어머니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만 크게 울고 말았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런 나를 달랬다. 어머니는 더운 우유 한 병과 빵 두 덩이를 챙겨 넣어주었다. 어머니는 내가 음식을 다 먹고 난 뒤, 물병은 버리고, 마치 가련한 아이인 것처럼 가장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어머니는 십자가 목걸이를 내게 걸어주면서, 내 호주머니에는 종이 한 장을 밀어 넣었다. 어머니는 나를 꼭 껴안은 뒤, 나를 보고 얼른 서둘러 떠나라고 하신다. 나는 큰 길에 들어선 뒤에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 때 어머니는 눈물을 닦고 계셨는데, 곧바로 돌아서시곤 문을 닫아버린다. 그 때 나는 반드시 이곳을 떠나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다닌 학교는 체력단련을 특히 중시했다. 덕분에 나는 먼 길을 빨리 걸어갈 수 있었다. 대략 날이 밝을 무렵 나는 포성이 다시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다. 그렇지만 대략 한 시간 지난 뒤, 모든 포성이 갑자기 멈추었다. 나는 소련군이 이미 시내에 진입했다는 것을 알았다. 소련군의 탱크가 시내로 들어오는 정경을 충분히 그려볼 수 있다. 물론 내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 어머니다. 시골에 거의 다 도착했고, 나는 이미 지쳐서 다시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나는 한 농가를 찾았고, 거기서 외양간의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 때는 날이 막 밝아오는 무렵이다. 시골 사람들은 밖으로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내가 외양간에 들어가자, 그 안에 말 한 필과 소 한 필이 있었다. 그것들은 꼬맹이가 저들의 처소에 들어와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나는 그 한 쪽에 풀 더미가 한 무더기 쌓여있는 것을 보고는 그 위에 쓰러져서 곧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보니, 내가 누워있는 곳이 편안한 침대 위가 아닌가! 나이든 노인 한 분이 아마도 줄곧 내곁에 앉아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깨어난 것을 보고는 창밖을 향해 남편을 큰 소리로 부른다. 자상한 이 노부부는 내게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묻는다. 나는 아버지와 형이 세상을 떠났고, 소련군이 시내에 들어왔고, 어머니와 나는 피난길에 올랐는데, 피난민이 많은 탓에 나는 어머니를 잃어버렸으며, 어머니가 일찌기 나에게 만일 서로 흩어지면 반드시 시골로 가라고 했으며, 그 곳에서 마음 좋은 농부가 나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했고, 그래서 이렇게 시골로 오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노부부는 곧 나보고 그 곧에 머물라고 했다. 그들은 아이들이 셋이 있는데, 그 중 둘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하나는 폴란드에 있다고 며칠 전에 편지가 왔다고 한다. 그들은 나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고, 나에게 뜨거운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그것을 먹고나서 내가 목욕을 하도록 해주었다. 그 뒤 나보고 잠을 한 숨 더 자도록 한다. 나는 마음을 놓았고, 집에 계신 어머니가 이제는 안심하시라고 마음속으로 말씀드렸다. 노부부는 나이가 상당히 많아서, 밭에서 힘든 일을 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밭에서 채소를 가꾼다. 나는 그들을 도왔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주일마다 교회에 간다. 나도 그들과 함께 교회에 간다. 노부부는 내 어머니가 내 옷 호주머니에 종이 한 장을 넣어 두었다며, 그것이 내 세례증명서라고 한다. 이 것이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어머니는 늘 교회에 갔지만 나를 데리고 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너무 어리다는 거였다. 그러나 내 동갑내기들은 교회에 다녔다. 나는 어머니가 기도하는 것을 알지만, 어머니는 나보고 한 번도 기도하라고 한 적이 없었다. 지금 내가 집을 떠나는 마당에 왜 내가 이미 세례 받았다는 사실을 내가 알도록 하는가? 내가 세례 받은 것은 분명히 하나의 비밀이었다. 어느 날 나와 이 댁 노인이 함께 밭에서 일하는 도중, 갑자기 부근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었다. 노인은 하던 일을 곧 멈추고 나에게 전쟁이 이제 끝났다고 말씀하신다. 온 식구가 교회로 가서 기뻐하였고, 마을 사람들도 모두 교회로 와서 전쟁이 끝난 것을 경축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나는 젊은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는데, 그것은 국가가 젊은이들을 모두 징집해서 전쟁터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이 무렵 나는 이미 노부부를 아버지와 어머니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법원에 가서 나를 아들로 등록했고, 이로써 나는 양부모가 생겼다. 내 양부모의 가장 큰 소원은 폴란드에 있는 둘째 아들이 안전하게 귀가하는 것이다. 폴란드에 있던 둘째 형이 마침내 돌아왔다. 나는 그가 돌아왔을 때, 문 입구에서 느꼈던 흥분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양 어머니는 그를 껴안고 울기도하고 웃기도 했다. 그는 내가 이 집에 온 사정을 물었다. 그는 나를 매우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양부모는 주방에 들어가서 곧바로 먹을 것을 준비했다. 그것이 산해진미는 아닐지라도 둘째 형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었다. 그는 근 이 년여에 걸쳐 매일 어머니가 만들어 준 음식을 먹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둘째 형은 안정을 찾은 뒤, 우리에게 나치당원들이 폴란드에서 유태인들에게 한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에 대하여 말을 할 때, 양 아버지는 나보고 자리를 뜨라고 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어린아이라서 그와 같은 잔인한 일에 대하여 듣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나는 우리 독일인이 어떻게 조직적으로 무수한 유태인들을 살해했는지 알고 있다. 어느 날 둘째 형이 나에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어느 유태인 어린이가 잡혀서 목욕을 하도록 했는데, 그 아이는 그것이 곧 자신을 독가스실로 보내서 죽이려한다는 것으로 알고, 독일어로 이렇게 물었다는 것이다. “나는 어린이입니다. 나는 아무런 잘 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나를 죽이려 하나요?” 이 말을 듣고 둘째 형은 무척 안타깝고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는 둘째 형이 자신이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그가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에 배속되었다고는 해도, 일찌기 처참하고 비인도적인 대학살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둘째 형이 내게 준 영향은 매우 컸다. 이 때부터 나는 나치당원들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으킨 만행을 매우 증오했고, 또 각 종족과 각 종교 간에 생긴 장벽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겼다. 둘째 형은 천주교로 개종하였고, 또한 한결같이 열심 했는데, 결국 산에 있는 봉쇄 수도원에 입회하여, 고신극기로 일생을 지내기로 하였다.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는 육식을 하지 않고, 서로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 그리고 영원히 그 수도원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 식구는 모두 둘째 형의 수도회 입회 예식에 참여했다. 그레고리안 성가가 불려지는 가운데, 둘째 형은 흰 수도복을 입고 나왔다. 수도복에 딸린 모자를 덮어 써 얼굴이 거의 가려진 탓에, 나는 둘째 형의 얼굴을 거의 못 알아볼 번했다. 그 때 내 나이는 겨우 아홉 살이었다. 둘째 형은 우리 집 식구 가운데 유일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양부모는 그가 봉쇄 수도회 입회하기를 줄곧 격려했었다. 그들은 둘째 형의 마음 속에 인간의 죄에 대한 깊은 의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고는, 그가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서 인간의 짓는 죄를 속죄하기를 바랐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가?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래 늘 잘 지냈고, 학교 성적이 좋아 늘 일등을 하였다. 또한 지도력이 있어서, 학생 동아리도 조직하였다. 그 동아리의 취지는 서로 다른 종족과 서로 다른 종교 간에 서로 신뢰를 지키고, 서로 이해를 증진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 이슬람 신자들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그들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 대다수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유대교 랍비를 모셔다 강연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의 의식에 참여하기도 한다. 나는 나치당이 집권하던 시절처럼 다른 종족에 대하여 증오하는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줄곧 내 생모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집은 이미 동 베를린에 속해있다. 할 수 있는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내 나이 스무살 때 동 베를린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곳에는 이미 내 옛집이 없어졌다. 당국이 그 자리에 새로운 아파트를 지어버린 것이다. 다행히 나는 잡화점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 가게 주인이 내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었다. 베를린이 함락된 뒤, 내 어머니는 여전히 살아계셨는데, 그만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렸다고 한다. 나는 다소 낙담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전쟁의 포화 중에 돌아가시지 않았다니,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내 성적이 좋은 탓에, 나는 어렵지 않게 장학금을 받아서, 괴팅겐 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하였다. 나는 전액 장학금을 받았는데, 애석하게도 양부께서 내가 대학 일학년 때 돌아가시고 말았다. 졸업하고 나서, 나는 시골집으로 돌아와 그 곳의 중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쳤다. 그리고 결혼도 했고, 딸 아이 하나를 낳았고, 양모와 함께 살았다. 내 처와 나는 같은 관점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모두 종교 신앙을 가지고 있고, 서로 다른 종족 간의 화합과 일치를 도모하고 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을 찾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우연히 그 프로그램을 보았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찾는 소식을 줄곧 기다려왔는데, 이 날 마침내 어머니가 나를 찾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비록 많이 늙으셨지만, 나는 여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도 분명히 어머니 이름이었다. 어머니는 병세가 심해보였는데, 나를 마지막으로 꼭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반복해서 피력하였다. 나는 곧바로 출발했다. 이 때 내 나이는 스무 여덟 살이었다. 내가 여덟 살 때 어머니 곁을 떠났으니, 어머니가 나를 못 알아볼 것이다. 나는 내가 어머니 곁을 떠날 때, 어머니가 내게 걸어주신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세례증명서도 지참했다. 나는 어린 시절의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다. 그러면 어머니는 나를 알아볼 것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지난 이십 년간 겪은 일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는 병상에서 자세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내게 제일 관심을 표명하는 것은 나치당에 대한 내 견해였다. 나는 나치의 행위를 증오한다고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내게 종교 신앙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어머니에게 우리 온 가족이 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딸은 출생하지마자 세례를 주었고, 매 주일 교회에 간다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끝으로 나에게 한가지를 더 묻는다. “아들아, 너는 좋은 사람이지?” 나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내가 비록 성인은 아닐지라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내 말을 들은 뒤, 비로소 안도의 기색을 보이며, 어머니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 “아들이, 이제 안심한다. 내 기도가 마침내 응답을 받았으니, 난 이제 편안히 떠날 수 있겠구나.” 나는 영문을 몰랐다. 왜 어머니가 그 때는 나를 떠나보내고, 지금은 다시 내가 좋은 사람인지 어떤지 관심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머니에게 왜 그 때 나를 집에서 떠나보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머니는 나를 곁에 앉도록 하고는 내게 큰 비밀 하나를 말해주겠다고 한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네 어머니가 아니다. 네 아버지도 사실 네 아버지가 아니다.” 나는 물론 엄청 크게 놀랐다. 그렇지만 나는 내 세례증명서를 보았다. 그 증명서에 분명히 내 부모가 누군지 기록되어있었다. 그곳에는 심지어 내가 출생한 병원까지도 기록되어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분명히 나를 낳았는데, 어떻게 내 어머니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부모는 누굽니까?” 어머니의 대답은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부모가 없다. 너는 복제되었단다.” 나는 심장이 곧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생물학을 배워서, 개구리를 복제할 수 있다. 그러나 고등동물을 복제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물었다. “나는 누구의 세포로 복제되었습니까?” 어머니는 나보고 마음의 준비를 잘 하라고 당부했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진상을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뒤 어머니는 내가 히틀러의 세포로 복제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또 다른 히틀러이다.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히틀러는 자신을 복제하려고 생각했다. 그는 괴팅겐 대학교의 러디웨이커(勒狄維克) 교수가 일찌기 개구리 복제를 했다는 것을 알고는 그 교수에게 자기(히틀러)를 복제하라고 강제한 것이다. 만일 그 교수가 거절하면 그 가족들에게 위해가 갈 수 있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그 교수는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복제에 성공했다. 당연히 그들은 그 태아를 잉태할 여성이 필요했고, 히틀러는 마침내 내 부모를 찾아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 부모가 매우 단순하고 정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게다가 어머니의 몸이 건강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어머니는 대리모로서 나를 잉태하게 된 것이다. 히틀러는 늘 사람을 보내서 내가 성장하는 모습을 살폈다. 그는 내가 절대로 어떤 종교 신앙이든 갖지 못하게 명령했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가 나를 교회에 데리고 가지 않은 원인이다. 그러나 내 부모님은 극도의 비밀 속에 아주 신속히 나에게 세례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전선으로 나가기 전에 어머니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는데, 그것은 내가 장래에 착한 사람이 되도록 키워서, 히틀러의 뜻이 실현될 수 없게 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집 문 입구에 군인 한 사람이 줄곧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군인이 철수 한 것을 안 뒤에, 내가 나치의 감시를 벗어나도록 했다. 결국 히틀러는 실패했지만, 나치당에 목숨을 바쳐 충성을 하는 무리들이 혹시라도 나에게 희망을 건다면, 내 운명은 참으로 비참해질 것이었다. 그 밖에도 어머니가 더욱 걱정하는 것은 소련군이 이미 내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집에서 내보내고, 마음씨 좋은 농가에서 나를 받아주고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집을 떠난 뒤부터 매일 밤 나를 위해 기도해 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본래 작은 타운으로 이사를 했었다. 나중에 오래된 친구들과 연락을 하기 시작했는데, 모두 나에 대하여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치 아무도 내 내력에 대하여 모르는 것 같아 보여 안심했다고 한다. 본래 내 내력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지금은 그나마 내 내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머니는 나를 만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제 편안히 떠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천당에 가면 그곳에서 아버지에게 내가 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은 아버지의 큰 소원이었기 때문이란다. 어머니가 내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난 뒤, 피곤한 기색이 확연해 보인다. 의사는 나에게 어머니의 병이 위중한데, 오직 나를 만나려는 일념으로 가득 찼었고, 이제 나를 만났으니, 아마 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나보고 떠나지 말라고 한다. 과연 어머니는 오래지 않아 임종상태에 들어가셨는데, 약 두 시간 뒤 돌연 깨어나서는 나보고 당신 곁에 가까이 오라고 하신다. 그러고 나서 아주 미약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씀 하신다. “아들아, 제발 절대로 콧수염을 기르지 말거라.”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웃음 짓는 어머니의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워 보인다. 마치 어린 아기 같다. 그 뒤 몇 분이 더 지난 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나서, 괴팅겐 대학교로 가서 러디웨이커 교수를 만났다. 사실 예전에 나는 그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나를 본 그는 매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듯 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정말 히틀러를 복제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완전히 강제에 의한 것이었단다. 그는 내 생활과 생각을 알고 난 뒤,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뒤, 그는 내가 절대로 히틀러가 원했던 그의 분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히틀러가 또 다른 히틀러를 복제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안다고 나에게 말한다. 히틀러가 히틀러인 주요한 이유는 그 특유의 관념이다. 그는 유태인을 증오했고, 세계를 정복하려 했고, 순종 아리안 민족이 전 세계를 통치하기를 염원했다. 이와 같은 미친 생각이 하나의 세포로 이식될 수는 없다. 러디웨이커 교수는 아주 놀라운 비밀을 하나 말해주었는데, 그것은 그가 여전히 히틀러의 세포를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자신이 그것으로 실험을 하여 나의 DNA 와 히틀러의DNA가 완전히 같은 것인지 어떤지 증명해 보면 어떻겠는가 하고 묻는다. 나는 거절했다. 나는 누가 내 DNA를 가지고 히틀러의 DNA와 같은 것인지 검사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히틀러가 아니다. 나는 나다. 히틀러 가슴 속에는 증오로 가득했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히틀러는 극도의 병적인 인종편견주의에 사로잡혀있었지만, 나는 서로 다른 종족 간의 이해 증진을 위해 줄곧 힘을 기울였다. 히틀러는 자기를 복제하기를 염원했고, 그리하여 나를 통제하려 했지만, 그는 틀렸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운명마저 통제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내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단 말인가? 차를 운전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라디오에서는 그레고리안 성가가 흘러나온다. 이 때 나는 봉쇄 수도원에 있는 둘째 형이 생각났다. 나는 불현듯 나와 히틀러가 크게 다른 점을 이해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둘째 형이 있지만, 히틀러는 나와 같이 타고난 복이 없다. * 리쟈통(李家同)의 이 글은 그것이 픽션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사실적으로 보인다. 이 글의 원문은 그가 1997년 4월4일 聯合副刊에 게재한 <我是我> 이다. 그는 1939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난 뒤, 뒷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국민정부가 타이완으로 건너올 때, 가족과 함께 어린 나이로 타이완에 건너와서 성장하고 살고 있다. 타이완의 대표적인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인 그는 현재 타이완의 지난(暨南)、칭화(清華)、징이(靜宜) 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중이다. http://blog.dreamwiz.com/bonojoy/13465408 |
성공과 실패는 습관이 만든다 (keec) 글쓴이 : KEEC 2012-08-27 13:08 |
성공과 실패는 습관이 만든다 성공한 사람들은 남보다 더 노력하고 인내하고 효과적으로 준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습관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 "하나의 새로운 습관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내부의 낯선 것을 일깨울 수 있다." 는 생떽쥐베리의 말처럼 일상을 변화시키려면 습관부터 바꾸어야 한다.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 세상에는 말하고 생각하고 계획하고 꿈꾸는 사람과 그 모두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있다. 실천하는 사람을 성공으로 이끌고, 꿈만 꾸는 사람은 실패로 끄는 힘은 습관이다. 목표를 세웠다면 당장 실천하자. 꿈만 꾸고 생각만 한다면 진정한 삶의 변화는 얻을 수 없다. 신중하게 새로운 습관을 찾아라. 습관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교체된다. 금연에 성공했지만 대신 먹는 습관이 생겨 체중이 느는 것처럼 한 습관을 중단하면 진공 상태가 발생하면서 다른 것으로 채워진다. 또 다른 나쁜 습관이 대체되지 않도록 구체적이고 신중하게 새로운 습관을 선택하자. 꾸준히 반복하라. 새 습관이 배려면 꾸준히 훈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바이올리스트 사라사테는 "사람들은 내가 지난 37년 동안 하루에 14시간씩 연습한 건 생각도 않고 천재라 부른다." 고 씁쓸해 했다. 최고가 되는 것은 재능보다 꾸준히 연습하는 습관에서 비롯된다. 크게 생각하고 작게 시작하라. 습관이란 오랜 시일에 걸쳐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갖게 되듯이 바꿀 때도 작은 것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실천하! 는 것이 중요하다. 마라톤 완주 목표를 세웠다면 단거리부터 1Km, 5km.. 달리는 습관을 들여야 완주할 수 있다. 자기를 통제하라. 피타고라스는 '가장 위대한 자산은 바로 자기 통제'라고 했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면 인생을 변화시키지도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도 못한다. 날마다 할 수 있는 조깅, 수영, 악기 연주, 독서 등 지속적인 활동으로 얻는 자기 수양, 의지, 인내가 자기 통제로 이어진다. 마음으로 리허설하라. 어떤 상황에 대해 대응 방식을 미리 머릿속으로 연습하면 나쁜 습관을 고칠 가능성은 더 커진다. 실제를 상상하면 정신적으로 준비할 때 행동을 이끄는 두뇌의 전두엽 피질이 활성화된다. 원하는 습관을 되새기며 마음으로 연습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