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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중심의 상담을 통한 새로운 리더십① (김무영) 글쓴이 : KEEC   2012-08-27 11:48


인간 중심의 상담을 통한 새로운 리더십1 〈대령 김무영 순천향대 학군단장〉 순천향대 김무영 학군단장(대령)은 본연구소에서 한국형에니어그램 5단계를 이수한 전문강사로서 군기관에 한국형에니어그램과 상담을 보급하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인간 중심의 상담을 통한 새로운 리더십①

상담은 전투력 창출의 한 기법


장병들의 병영생활과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구성원 간의 다각적 대화와 상담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다원화되고 복잡한 사회, 군 구조에서 장병들의 확고한 집단 응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군 간부들이 인간 중심의 상담 기법을 이용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기풍이 조성되고 있다. 순천향대 학군단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무영 대령은 최근 이와 관련한 현실 인식과 상담의 중요성, 기법, 제언 등을 정리해 군 간부들과 교감하고 싶다며 글을 보내왔다. 김대령의 글을 3회에 나눠 게재한다. 〈편집자〉

상담, 리더십 영역으로 이해해야

일부 사람들은 상담을 필요로 하는 사람, 즉 내담자를 환자나 문제를 가진 부적응자로 보고 병을 치료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상담을 단순히 개인 면담의 수준에서 애로 사항을 파악, 피상적으로 조치하는 것 등으로 인식하다 보니 상담의 근본적인 성격과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상담 분야의 전문적 이론이나 기술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부족했고, 특히 전문 요원 양성에는 관심을 두지 못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상담 활동이 사고를 예방하는 것으로만 인식하고 접근하다 보니 지엽적이 되고 영속성 있는 업무가 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사고 예방 차원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조직 목표에 기여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상호 작용에 따른 인간의 성장으로 전투력 창출의 한 기법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과거 비교적 단순하고 변화가 없었던 전통 사회에서 파생된 대부분의 문제들은 자신의 힘으로 쉽게 해결될 성질의 것이었으나 현대 사회는 과거 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삶의 난제가 발생해 상식적인 충고나 조언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또 집단의 역동적 대인 관계가 고지식하고 개방적이지 못해 원만한 인간 상호 관계가 유지되지 못한 것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군에서도 개인이나 집단의 응집력을 제고하기 위해 리더십의 실제적 영역으로서의 상담을 이해해야 함은 물론 상담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실정이다.

감정 탐색 통해 긍정적 변화 유도

먼저 상담은 영어로 돕는다는 차원에서 헬핑(helping), 돕는 사람을 헬퍼(helper)라한다는 의미에서는 카운슬링(counseling), 카운슬러(counselor)라고 하는데 학자들마다 상이하게 사용하고 있다. 개인 상담이란 것이 무엇인가. 상담은 내담자가 자신의 감정을 탐색하고 통찰해 자신의 인생에 긍정적 변화를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활동이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고자 상담자와 내담자는 합동으로 작업하는데 상담자는 변화 과정을 촉진시키며 내담자는 무엇을 어떻게 변화하고 싶은 것인지 결정한다.

〈대령 김무영 순천향대 학군단장〉

국방일보 - [2005년 03월 05일 기사]

모든 존재의 경이로움 (양재오) 글쓴이 : KEEC   2012-08-27 11:48

모든 존재의 경이로움 by Ralph Marston / 양재오 옮김


존재(存在)하는 그 모든 것의 경이(驚異)로움을
경탄(驚歎)해 본 적이 있나요?

아주 작은 사물들을 지켜보며
그것들이 어떻게 완벽하게 서로 잘 어울려 일을 도모하는지
경탄하며 바라본 적이 있나요?

그 모든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그것들이 비록 한계(限界)가 없을 때라도
어떻게 매순간 그렇게 증식하고 성장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기 위해 멈추어 서 본 적이 있나요?

불가해(不可解)한 힘에 의하여
가을에 나뭇잎이 나풀나풀 떨어지고
그 힘이 나뭇잎을 봄에 다시 돋게 할 때
경이로운 적이 있나요?

밀려오는 파도(波濤)를 바라보고,
그런 다음 그 너머로 수면(水面)이 하늘과 맞닿은
저 먼 수평선(水平線)을 바라 본 적이 있으며,
당신 면전(面前)에 펼쳐진 광대한 공간이
실재(實在)하는 것 가운데
그저 작은 귀퉁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나요?

상상할 수 없이 거대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며,
그것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작은 한 귀퉁이이라는 것을 이해하나요?

모든 기쁨과 고통을 넘어
그리고 그보다 더할 수 없이
희망이 없을 때도
어떻게 사랑은 여전히 그렇듯 살아있을 수 있는지
경탄해 본 적이 있나요?


무거운 돌을 들어올리느라 애쓴 적이 있나요, 그리고
어떻게 힘들이지 않고
평원에 수천미터 높이의
거대한 산이 솟을 수 있는지 경탄한 적이 있나요?

당신이 얼마나 알 수 있는지,
당신이 얼마나 많은 경이로움을 체험할 수 있는지 상관없이,
늘 그리고 언제나 그 이상으로 알고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깨달은 적이 있나요?

당신이 왜 경이로워하는지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정의내릴 수 없을 때도
왜 당신이 아름다움을 아는지
그것에 대하여 경이로운 적이 있나요?

경이로운 일을 하는 이,
당신의 눈을 통하여 찾고 있는 이,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온전히 제 집에 있는 듯 평온함을 느끼는 이를 보고
경이로워 한 적이 있나요?

당신이 믿는 것이 무엇이든,
당신이 고백하는 것이 무엇이든,
당신이 의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희망하는 바가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이 경이로움이라는 것을
당신이 용인(容忍)하고
당신 자신이 알게 할 때,
당신의 마음이 부인(否認)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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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nder of It Allby Ralph Marston

Do you ever wonder
At the wonder of it all?
Do you ever stand in awe
of the tiniest things
and how perfectly they work together?

Do you ever stop to think
about all the possibilities
and how even though they have no limit
they grow in number with every minute?

Do you ever wonder
when the leaves flutter down in autumn
at the incomprehensible power of life
that brings them back in spring?

Do you watch the waves roll in
and then look out far beyond them
where the water seems to touch the sky
and realize
that the vast expanse before your eyes
is only a small little corner
of all there really is?

And do you comprehend that all there really is,
as unimaginably grand as it may seem,
is only a smaller corner still
of all that there can be?

Do you ever wonder
how love can stay alive
past every pleasure and every pain
and even when there can be no hope
there is more than ever?

Do you ever struggle to lift a heavy rock and wonder
how a massive mountain can rise
thousands of feet above the plain
without even trying?

Do you ever realize that
no matter how much you may know,
no matter how many wonders you may have experienced,
there will always, always be more?

Do you ever wonder
why it is you wonderand why you know what beauty is
even though you can't define it?

Do you ever wonder
who is doing the wondering,
who is looking out through your eyes
and feeling completely at home
with the wonder of it all?

Whatever you believe,
whatever you profess,
whatever you doubt or fear or hope for,
there are some things
your heart cannot deny
when you let go and let yourself know
the wonder of it all.

Copyright ⓒ 2003 Ralph S. Marston, Jr.

NOTE: The poem used in this presentation is from Ralph Marston's latest book, "Living the Wonder of It All."

+ 출처 http://wonderofitall.com/

2004.5.25. 석탄일 전야
소개 및 우리말 옮김: 양재오
잃어버린 미소(微笑)를 찾아서- 서산 마애삼존불 (양재오) 글쓴이 : KEEC   2012-08-27 11:47

잃어버린 미소(微笑)를 찾아서- 서산 마애삼존불 글. 사진 양재오 이 글은 지난 10월 28일, 제28기 박물관특설강좌에 제출한 글이다

잃어버린 미소(微笑)를 찾아서- 서산 마애삼존불

글. 사진 양재오

오늘날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급속히 변화하는 산업화된 사회, 지식을 기반으로 한 정보화 사회에서 살아간다. 이와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를 든다면, 그것은 아마도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마음의 여유가 없는 이들의 얼굴은 대체로 무표정할 뿐만 아니라 생동감이 없다. 저들의 몸은 살아있지만 그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서 휴식이 필요해 보인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의 얼굴에 그 무슨 결의에 차있는 듯한 긴장감과 적의(敵意)마저 서려있는 듯 하다. 버스나 전철에서 그리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길을 걷다가 서로 부딪힐 때 미안한 표정이나 미소로 미안함을 표시하는 여유를 가진 이들을 만나보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게 중에 어떤 이들은 미안한 기색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역정어린 기세로 상대를 제압하려들기도 한다. 웃을 수 있는 여유와 미소를 잃어버린 세대의 한 단면이다.

그러면 우리 조상들도 이처럼 웃음을 잃고 마음의 여유 없이 각박하게 살았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백제의 마애불을 친견하면서1), 우리 선조들은 꾸밈없는 웃음과 미소(微笑) 띤 얼굴로 이웃을 대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여기서 나는 백제의 마애불, 그 가운데서 특히 백제 후기의 작품으로 얼굴 가득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어 백제인의 온화하면서도 낭만적인 기질을 엿볼 수 있고, 다른 마애불에 비하여 보존 상태가 상대적으로 양호하여 감상이 용이하다고 생각되는 서산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의 얼굴 표정을 좀 더 가까이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도톰한 눈두덩과 웃음 진 눈매, 널찍하고 펑퍼짐한 코와 잔잔한 입가의 미소, 그야말로 온 얼굴이 웃음으로 가득한 백제의 불상은 서산 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가야산의 절벽에 새겨져 있는 이 마애삼존불은 2.8 미터 높이의 주존불(主尊佛) 입상과 각각 1.7 미터 높이의 우협시인 봉지보주 관음보살(捧持寶珠觀音菩薩)과 좌협시인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 백제인의 높은 석조기술을 보여준다.

먼저, 두 협시보살을 양쪽에 거느리고 나타난 듯한 중후한 체구의 입상인 본존(本尊)은 그 머리에 보주형 두광(寶珠形頭光)이 있으며 소발의 머리에 육계는 작다. 또한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미소를 함빡 머금고, 대체로 반쯤 감긴 눈에 명상하는 모습을 지닌 여타 여래와 달리, 이 본존의 눈은 살구 씨 알맹이 같은 모양(杏仁形)의 눈을 활짝 뜨고 있다. 가사의 옷 주름은 U자 형으로 늘어뜨려서 자연스럽고 넉넉한 맛이 있다. 이 본존의 수인(手印)은 시무외인(施無畏印),여원인(與願印)으로 왼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꼬부리고 있다.

첫 눈에 들어오는 이 본존은 지존한 모습으로 위엄이 서려있기보다는 오히려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친근하게 다가와 금방이라도 내 어깨를 다독여 줄 듯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원만한 모습을 띠고 있으며, 삼존불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남성적 이미지를 좀 더 드러내는 이 본존불은 그 나름의 기품을 지녔으면서도, 그것이 내면으로부터 은근히 풍겨 나오는 까닭에, 뭇사람들과의 거리를 좁히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자태를 보여준다.

그 다음, 본존 오른쪽의 관음보살은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얼굴(相好)은 본존과 같이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는데 눈과 입 그리고 두 볼과 뺨에 이르기까지 온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고, 거기에 더하여 홍조(紅潮)를 띠고 있는 듯 하다. 강우방 교수는 “이 관음보살의 얼굴은 삼국시대 불상들 가운데 가장 매력적”이라고 평가하는데,2) 이에 공감한다. 나는 또한 이 관음보살을 볼 때마다 백제의 앳된 처녀나 젊은 여인의 가냘픈 듯 옅게 피어오르는 미소를 떠올린다. 유달리 미소가 앳되고 아름다운 이 관음보살의 목에는 짧은 목걸이가 걸려있고, 마치 어루만지듯 소담스럽게 두 손으로 가슴 앞의 보주(寶珠)를 소중하게 부여잡고 있다.

또한 지극히 여성적인 풍모를 지니고 있는 이 관음보살상은 백제 여인의 전형으로 보인다. 아니, 어쩌면 이 삼존불을 배치하고 조성한 장인의 가슴 속에 새겨진 백제 여인의 모습이 이처럼 드러난 것일 게다. 소박하고 부드러운 얼굴에 드리운 소리 없는 웃음으로 이 곳을 찾아 소박하면서도 절실한 기원을 하는 백제 사람들을 맞이하였을 이 관음보살은 일상에서 갖은 애환을 지니고 사는 이들의 친근한 벗이요 동반자가 되었을 것이다.

끝으로, 본존 왼쪽에는 통상적인 삼존불 양식에서 벗어나서 파격(破格)적으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 배치되었다. 현존하는 이 보살상은 두 팔에 크게 손상을 입고 있으나 전체의 형태는 충분히 볼 수 있으며, 특히 이 보살의 얼굴부분이 손상을 입지 않아서 무척 다행스럽다. 머리에는 관을 썼고 얼굴은 다른 상들과 같이 원만형(圓滿形)으로 온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상체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이고 목에는 짧은 목걸이를 걸쳤고 허리 밑으로 내려온 옷자락에는 고식의 옷 주름이 나 있다. 머리 뒤에는 큰 보주형 광배가 있는데 그 형식은 오른쪽의 관음보살의 광배 양식과 같다.

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 보살로서, 천진난만하고 낙천적인 그 용모(容貌)와 자태(姿態)가 내 가슴에 깊이 자리한다. 글쎄다. 이와 같이 천진무구(天眞無垢)한 보살에게서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출가 전에 노심초사 고뇌하고 번민했던 깊은 사유(思惟)의 그 어떤 흔적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장난기 어린 얼굴에 반가좌(半跏座)로 가슴을 쭉 펴고 비스듬히 앉아 한쪽 발을 구르며 '오늘은 어제와 다른 그 무슨 재미나고 좋은 일이 없을까'하고 궁리하는 개구쟁이의 모습을 보게 된다.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고 천진무구한 이 보살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 자체가 큰 기쁨이요 행복이 아닐까.

생동감 있는 얼굴과 손의 양감이 느껴지며 부드러운 옷 표현, 그리고 얼굴 전체에 미소를 함박 머금고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은 명실공히 백제의 마애불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3) 서해를 사이에 두고 중국 산동반도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까닭에 중국으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전해졌을 부처의 가르침(佛敎)과 함께 전해왔을 불상 양식은 시간이 지나며 백제화 하였을 터인데, 우리는 그것을 서산 마애삼존불4)에서 본다. 이러한 마애불을 통하여 백제화한 불보살(佛菩薩)을 친견하게 되고, 그 속에 내재한 백제 사람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얼굴을 대면하게 되는 것은 큰 기쁨이요 행운이다. 분망한 현대사회에서 미소(微笑)를 거의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이들이 이와 같은 마애불의 친견을 통하여 우리 선조인 백제인의 미소를 만나고 그들과 같은 여유를 회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이 글을 쓰는데 도움을 받은 책들 : (1)강우방,<한국 불교 조각의 흐름>,대원사,1999. (2)문명대,<마애불>,대원사,2003. (3)안휘준,<한국의 미술과 문화>,시공사,2000.

미주)

1) “백제 마애불은 예산 사방불, 태안 마애불, 서산 마애불 등 3점밖에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들은 백제 불상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불상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이들은 중국과 인도의 불교문화와 교류관계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귀중한 예로서 중요시되고 있다.”(문명대,<마애불>,대원사,2003. 32쪽에서 인용) 이 가운데 예산 사방불은 아직 친견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사진으로 감상할 수밖에 없어 못내 아쉬운데,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한편 2년 전 안면도 꽃지에서 개최된 국제 꽃 박람회를 다녀오는 길에 다행히 태안 마애삼존불(국보 제307호)을 친견할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친견하고 싶었던 서산 마애삼존불은 마침 지난 해 9월 해미에 들렀다 오는 길에 방문하였고, 금년에는 역시 지난 달(9월 중순)에 두 번째 방문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런데 이 가운데 예산 사방불(혹, 사면불,四面佛)은 백제시대 납석제(蠟石制,곱돌) 돌기둥에 새긴 사방불상(보물 제794호)인데, 문명대 교수는 이것이 거대한 석주가 아니어서 마애불이라고 하기에는 꼭 맞지 않는 점도 있다고 언급하면서, 그 조각 기법이 마애적인 것으로 보고, 이 불상을 일단 마애불로 분류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문명대,<마애불>,대원사,2003, 40쪽 참조) 한편 이 예산 사면불의 머리부분이 잘려나가서 그 얼굴(相好)의 전모를 볼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2) 강우방,<한국 불교 조각의 흐름>,대원사,1999, 183-184쪽.

3) 위와 같은 책 184쪽 참조.

4) 강우방 교수는 그가 쓴 책 <한국 불교 조각의 흐름> 184쪽에서 “이러한 삼존불의 도상은 백제의 독자적인 창안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이것은 불교 신앙의 체계도 백제 나름으로 전개되어 갔음을 의미한다.”고 언급하였다. 실상 우리는 태안 마애삼존불과 함께 이곳 서산 마애삼존불에서 드러난 기존의 불상조성 형식 및 양식과는 다른 파격(破格)적 표현을 통하여, 당시 이 마애불을 구상하고 조성한 사람들의 주체적 문화역량과 자기다움을 의연하게 표현하는 자신감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애초의 대승불교운동이 그러하고, 일련의 불교전파 과정에서 보듯, 이 마애불을 만든 백제 사람들도 그들의 토착 사회와 문화의 자양분을 지니고 주체적으로 부처의 가르침(佛敎)을 수용하였고, 그들 자신의 불교적 사유의 자유로움과 창의성을 발휘(發揮)하였는바, 마애불을 통하여 그들의 얼굴, 그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각인(刻印)한 것이라고 본다.

이런 이해와 함께 다시 한번 서산 마애삼존불을 꼼꼼히 뜯어보면, 무슨 까닭에서인지 “이 마애삼존불을 조각한 이가 출가 수행자였을까, 재가불자였을까.”하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그러고 나서 곰곰이 좀 더 생각하는 과정에, 이 마애삼존불을 조각한 장인은 아마도 불심이 돈독한 재가불자(在家佛子)였을 거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그런 생각의 일단은 거대한 화강암 벽에 새겨진 이 삼존불의 배치(가운데 주존불을 중심으로 하여 그 오른쪽에 관음보살, 그 왼쪽에 반가사유보살을 배치 한 것)에서 주존을 중심으로 하여 그 양쪽에 배치된 보살이 하나의 가정을 이룬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귀여운 아들 하나 둔 불심(佛心)이 돈독한 장인이 사찰(寺刹)의 명으로 이 마애삼존불을 조각하는 과정에서, 화목하고 화기애애한 그 자신의 가정의 이미지가 암묵적으로 투영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이 마애삼존불을 조성한 장인은 재가불자로서, 혹시 고타마 싯다르타가 출가 전에 이룬 가정을 한 번 염두에 두고, 그런 상념이 그의 손길을 통하여 이 암벽 화강암에 투영된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이 마애삼존불에는 출가 이전의 고타마 싯다르타가 가운데 배치되고 그의 부인 야소다라를 오른 쪽에 그리고 아들 라훌라가 왼쪽에 배치되어 하나의 오붓한 가정을 이루는 배치도를 한 번 그려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산 마애삼존불 앞에 선 나에게 이와 같은 상념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마도 '예수, 마리아, 요셉'이 이루는 그리스도교의 성가정 Holy Family의 모형이 부지불식간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예수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의 유년시절과 그 시절 어린 예수가 그의 양부로 일컬어지는 요셉과 그의 모친 마리아와 함께 오붓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담은 상본(像本)들이 많이 제작되어, 신심이 돈독한 신자들 사이에 유포되고 있다. 이것은 이를테면 그리스도교의 '삼존상(三尊像)'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 글은 지난 10월 28일, 제28기 박물관특설강좌에 제출한 글이다 )

http://mm.dreamwiz.com/media/folderListSlide.asp?uid=bonojoy&folder=1&list_id=3864209&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