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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얼굴 (양재오) 글쓴이 : KEEC   2012-08-27 11:29

웃는 얼굴

어제 저녁에 찰리와 함께 몇 번 들른 적이 있는 와잇플레인즈(White Plains)의 보더즈(www.borders.com) 서점에 들러서 시간을 죽이다가, 결국 수피 심리학 관련 서적 한권과 함께 틱낱한(Thich Nhat Hanh) 의 강연을 한권의 책으로 묶은 BEING PEACE 를 들고 나왔다.

지난 밤에 곧바로 잠도 오지 않고해서, 틱낱한의 것을 한 시간 여 읽다가 잠이 들었다. 그의 글 첫마디는 삶이 고통으로 채워져있다는 수행자(불교승려) 로서의 기본 통찰을 전제하면서도, 그 삶은 또한 경이로움으로 가득채워져있다는 현상도 적시한다. 그러면서 평화 운동가로서 평화롭고 행복한 삶은 바로 나 자신의 작은 미소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 평화는 그 작은 미소의 경이로움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듯이. 좀 늦은 잠자리였지만, 평온하게 잠들수 있었다.

아침마다 한 방 건너에 있는 작은 채플에서 빅터(Victor Marshall)와 함께 미사에 참여하곤 하는데, 오늘 아침에 들은 것은 마태오(마태) 복음서에 나오는 한 부분이었다.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하여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나섰다가, 기어코 찾아낸 뒤, 그 찾았을 때의 기쁨을 전해주는 이야기. 그리고 그에 앞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그 말씀을 듣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서로 나누기를 하였다. 특히 어린이와 그들의 천진난만, 그리고 티 없이 맑은 그들의 웃음, 그리고 또 그 천진난만함을 잃어버린 불쌍한 어른들에 대해서도.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우리나라 속담이다. 요즘도 이런 속담이 자주 쓰이는지 모르겠으나, 웃는 얼굴이나 미소는 참 좋다. 혹시 지금도 기억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70년대쯤으로 기억되는데, 한 때 우리나라에서 스마일 운동을 전개했던 적이 있다. 새마을 운동처럼 그것도 하나의 운동(!)으로서 전개되었다. 예전에 나는 가수 한명숙, 문주란 그리고 박재란, 김상희 누나들을 좋아하는 어린이였는데, 그 분들 중에서 어느 분이 한 번 나왔다 하면, '노란셔츠 입은 사나이'를 아주 시원스럽고도 멋지게 불렀다.

그 분이 한명숙 누나 였던가? 아무튼, 그 때문에 한 때, 나는 노란 셔츠를 즐겨 입고 다녔는데, 이른 봄 노란 색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환하게 해주는 개나리꽃처럼 밝은 노란색 셔츠 왼쪽 가슴에다가 양철판을 이용하여 동그랗게 얼굴 형상을 본 뜬 위에다가 미소를 머금은 제법 큼지막하고 아주 단순한 스마일 캐릭터/엠블램을 달고 다녔다. 비교적 수줍음을 잘 타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큼은 보란 듯이 달고 다녔던 기억이 지금 되살아난다.

팍팍한 세상살이에 긴장하고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도 어린아이를 좋아하고, 또 그들이 즐겁게 떠들어 대며 웃는 모습을 볼 때, 잠시나마 각박한 세상사의 시름을 잊을 수 있다. 그들도 한 때는 어린이였다. 나는 어린이의 웃음과 미소에 분명히 치유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즐거운 순간, 그 즐거움을 아무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유쾌하게 웃음소리에 담아내는 어린이의 얼굴. 수줍을 때는 그 수줍음을 수줍은 낯에 그대로 드러내며, 멋쩍어 하는 그 얼굴. 어린아이의 표정은 꾸밈이 없다. 그 꾸밈없음이 바로 그들의 매력이다. 이런 꾸밈없는 얼굴과 웃음 띤 표정은 가끔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에서도 피어난다. 그들의 웃음과 미소에는 그 어떤 적의나 음모, 꾸밈이 없다. 그들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른 어른들은 웃을 줄도 미소 지을 줄도 모르는가? 아니다. 그들도 때로는 어린이들처럼,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잘 웃고 멋진 미소를 지을 줄 안다. 그러나 그들의 웃음이나 미소가 마치 배우들의 그것처럼 그럴듯해 보이지만, 어떤 경우에 그 웃음이나 미소의 뒷면에는 그 어떤 전략이나 음모가 숨겨져 있기도 하다. 가끔 신문이나 방송에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서로 반가운 듯이 손을 잡고 흔들어 대며(악수), 기자들 앞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는 이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목격하는가?

경쟁하는 사회에 편입된 이들에게 얼굴/표정 관리는 아주 중요한 일일 수 있다. 그 관리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이른바 사회적 성공과 실패가 좌우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성장해 가면서 기성세대/어른들로부터 학습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꾸민 웃음/미소이다. 곧 상대를 압도하기 위하여 거만한 얼굴표정에서 흘러나오는 웃음과 미소, 상대의 선처를 기대하며 자신을 낮추는 비굴해보이기까지 하는, 그래도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취하는 그런 억지로 꾸민 웃음이나 미소/얼굴표정 말이다. 그 때의 그 꾸밈은 참으로 절실한 것일 게다. 그 분들께 힐난보다는 동정이 간다. 이 경쟁사회에서 살아야 하니까.

빅터는 지금 칠십 줄에 들어선 분인데, 그가 오늘 아침에 말한다, 자신은 어린아이들과 노는 것이 좋다고. 아이들과 함께 놀 수 없을 때는 그들이 노는 모습을 즐겨 지켜본단다. 얼마 전에 아이들이 잔디 위에서 야구놀이를 즐겁게 하는데, 아이들은 그 놀이 자체를 무척 즐기는 것 같더란다. 그런데, 그 뒤에서 아이들의 몇몇 부모가 경기를 지켜보며 응원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아이들의 놀이 자체보다는 승부에 더 관심을 갖더란다. 그런 그들은 아이들이 더 경쟁적이 되고, 그래서 자기 아이가 속한 팀이 그 경기 - 이 때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라 싸워서 반드시 이겨야하는 경쟁이 되는 것 - 에서 이기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자라고 있다. 어제까지는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동무들과 함께 노는 자체를 즐기며, 해맑은 웃음을 짓던 어린이들이 그들의 부모, 기성세대들이 주조한 사회에 적응(?)하는 훈련을 해 나가도록 요청받는다. 물론 어린이들도 짓궂은 웃음을 짓기도 하고, 또 그들 나름대로 머리를 짜내어 다른 친구들을 골려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른들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어린이들이 비록 경쟁하는 사회의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어린이다움을 잃어버리도록 하는 도전을 받고, 부득이 경쟁하는 이 사회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서 그 요구에 길들여져 갈수밖에 없을지라도 어린시절의 천진난만함과 그 꾸밈없는 웃음을 그들의 가슴에서 마저, 지워버리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경쟁하는 사회에 사는 이들은 무엇을 꿈꾸며 살까. 그들도 실은 그곳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을 것이다. 내가 꿈꾸는 하늘나라 - 이상 국가는 더 이상 경쟁할 필요 없이 함께 뒹굴며 순진무구함에서 우러나오는 해맑은 얼굴을 서로 마주보며 사는 것이다, 마주보며 웃는 두 얼굴 사이에 아무런 너울이 없는. 그 곳에 참 평화가 있지 않을까.

(2002/08/14 뉴욕 아시닝에서 양재오)
신성이라는 이름의 사랑 (KEEC) 글쓴이 : KEEC   2012-08-27 11:28

신성이라는 이름의 사랑 ♡

우리가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은 서로에 대한 끌림입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끌림은 서로에 대한 밀어냄을 동반합니다.
끌림과 밀어냄의 메커니즘을 이해 하는 데는 지구의 이원성과
양극성을 이해 해야 합니다.

흔히, “필링이 왔다.” “ 강렬한 끌림이 왔다” 그래서
“사랑에 빠졌다” 라고 합니다.
이런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엄청난 착각입니다.

사랑은 불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하는 전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어느날 갑자기 생겼다가 그 다음 날 갑자기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그럼,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이란 어떤 생각이나 행동에 국한 되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자신을 통하여 자신의 주변에 일어나도록 허용된
에너지 입니다.

사람의 원래의 본성은 신성한 사랑 입니다.
하나의 육신이 다른 육신을 보살피는 것을 사랑으로 생각 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이란 그렇게 제한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근원적으로 부여 받은 본연의 자질 입니다.
사랑으로부터 모든 존재는 창조 됩니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사랑할 때가 있으면 사랑이 식을 때도 있다고
얘기하는 것은 잘못 입니다. 이렇게 왔다가 사라지는 사랑은 자신의
에고에 근거를 둔 감정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다는 느낌을 가진 사랑을 하다가도, 자신에게 무엇인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 실현되지 않으면 ‘사랑이 식었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서로 기대감 속에 매달리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영원한 사랑은 생겨났다가 상황에 따라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변함없이 늘 있는 것,
알아보기 쉬운 것,
숨기지 않는 것,
간단한 것,
서로 믿는 것,
어린아이같이 순수한것,
모든것을 아는 통찰력,
이런 것이 바로 참사랑 입니다.

사랑은 처음부터 완전한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들도 신성이라는 사랑을 알때,
그때 비로소 완성, 자아실현(수퍼에고)의 고지에 다다른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으로 빛나십시요.* 진주 총총..
누군가 그대를 모욕하거든 (KEEC) 글쓴이 : KEEC   2012-08-27 11:27

구르지예프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의 할아버지의 죽음이 그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고.
구르지예프가 아홉살 때, 그의 할아버지는 어린 구르지예프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난한 사람이라 너에게 남겨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하지만 꼭 한 가지,
내가 너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 이후로 내가 항상 보물처럼 간직해왔던 것이 란다.
비록 너는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기억하도록 해라.
언젠가 내 말을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잊지 말고 기억하거라.
지금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잊지 않고 기억할 수만 있다면 그 의미를 이해할
날이 꼭 올 테니까 말이다.”

그의 할아버지가 구르지예프에게 한 말은 이랬다.
“만일 누군가 너를 모욕하거든, 24시간이 지난 후에 그에게 맞서도록 해라!”
24시간 후에 맞서라고? 24시간이 지나고 나면 분노는 더 이상 분노로 남아있을 수 없다.
분노는 즉각적인 분출을 요구한다. 하물며 모욕을 당한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24시간을 기다리라니?

“누가 너를 모욕하거든 혹은 너를 화나게 만들거든,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해라.
‘내일 다시 오겠다. 나는 24시간이 지난 다음에 비로소 대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할아버지가 임종하는 자리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미 한 약속을 깰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일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오겠다.”
당연히 모욕을 준 사람은 이 돌발적인 상황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구르지예프는 이 상황을 두고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상황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게 된다.

모욕을 한 남자가 옳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다시 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당신은 내가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혹은 그 사람의 말이 전혀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그의 말이 전적으로 틀렸다면, 그 말에
신경을 쓸 까닭이 무엇인가?
그의 말이 상처가 되었다면, 낱말 속에 감춰진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상처가 될 이유가 무엇인가 말이다.

이처럼 구르지예프는 같은 방식을 분노뿐만 아니라 다른 감정을 다루는 데도 활용했다.
그때마다 감정은 사라져버렸다!
구르지예프는 붓다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고지에 도달한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 놀라운 여정은 아주 작은 발걸음에서 시작되었다.
죽음을 맞고 있는 할아버지와의 약속. 그 약속이 그의 전 생애를 바꿔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