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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1 글쓴이 : KEEC   2018-07-25 09:45

오페라의 유령, The Phantom of the Opera(2004)
- The Music of the Night ,  the prison of my mind, You are not alone. -

Main Themes: Mask, Loneliness, Angel of Music, Guide and guardian
            1:1, darkness, shelter, freedom, Point of No Return
            the dungeon of my black despair, the prison of my mind

오페라의 유령 시놉시스
오페라의 유령의 이야기는 1861년 파리에서 시작된다. 무대는 화려한 음악과 춤의 전당 오페라 극장, 오페라 극장은 정식으로는 '국립음악 무용아카데미'라 하는데 세계에서 가장 큰 가극장이며, 그 외관은 웅장하고 화려한 그리스식 건물이다. 무대는 한꺼번에 450명이나 등장살 수 있는 넓이이고 천장에는 샤갈의 '꿈의 꽃다발'이 그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그림과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는 넓은 홀이나 대계단에는 저마다 멋진 의상으로 치장한 선남선녀가 오가고 있어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페라의 유령'의 주인공은 바로 언제나 오페라극장의 5번 박스석을 차지하는 괴신사다. 그는 가스통 르루의 원작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희생자로 흉칙하게 일그러진 한쪽 얼굴을 감추기 위해 마스크를 쓴다는 것이다.

리허설중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고 때문에 주역 여가수가 출연을 거부하고, 합창단원들의 추천으로 무명 크리스틴은 대역으로 나선다. 크리스틴은 '나를 생각해줘요'를 완벽하게 불러내고, 공연은 대성공을 거둔다. '오페라의 유령'은 그랜드 오페라 '한니발'의 드레스 리허설을 끝내고 분장실로 돌아온 아름답고 젊은 프리마돈나 크리스틴 다에를 납치하여 분장실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지하마궁으로 사라진다.  '미녀와 야수'의 야수처럼 유령은 크리스틴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바치면서 자기가 작곡한 오페라 '의기양양한 돈환 Don Juan Triumphant'에서 돈환의 연인 아민타역을 노래해 줄 것을 크리스틴에게 간청한다. '꿈 속에서 네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그가 내 앞에 나타났네. 이건과연 현실일까, 오페라의 유령은 내 마음속에 있었어….'
크리스틴와 유령이 '오페라의 유령'을 부르고 수십 개의 촛불이 일렁이는 마궁에서 괴신사는 신비로운 음성으로 '밤의 노래'를 부른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괴신사의 얼굴을 본 크리스틴은 경악하고, 극장에서는 예기치 못한 사고가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크리스틴에게 연인 라울은 자신을 믿으라며 '그대에게 바라는 바'를 불러주며 사랑을 고백한다.

6개월 후의 공연날 유령은 등장인물로 변신해 크리스틴을 납치하고 미궁에 뒤따라온 라울이 함정에 빠져 죽을 위험에 빠지자 크리스틴은 그를 구하기 위해 유령에게 키스한다. 충격받은 유령은 그들을 놓아준다. 사람들이 미궁을 덮쳤을 때 남아 있는 것은 유령의 흰 가면뿐이다.
성경의 창세기에 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인간은 신의 형상대로 빗어진 존재로서 신성한 빛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지만 인간이 자신의 본질에서 멀어졌을 때 신성한 빛의 옷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옷을 입게 된다.

인간의 최초의 옷을 무엇이었을까? 무화과 잎, 아니면 양의 털..., 인간의 최초의 옷은 자신의 신성을 보지 못하고 벗을 몸을 나라고 여기는 거짓된 이미지, 즉, 거짓된 성격일 것이다.
즉, 진정한 내가 아닌 나의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착각이다. 나의 영혼은 내가 만든 나의 것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무의식 속에 갇혀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있기 때문에 우리의 본질적인 영혼의 힘은 타오르지 못하고 꺼져가는 불씨처럼 존재한다. 이러한 상태는 우리의 일상의 경험과 인간관계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고통과 좌절 속에서 우리를 머물게 한다.

“유리처럼 약해서 깨지기 쉬운 가면, 사람은 본디의 얼굴을 숨기고 그것을 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리가면”이라는 만화의 한 대사처럼 인간은 자신의 본질과 만남을 두려워한다. 본질에서 멀어진 인간은 삶 속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면을 쓰게 된다. 하지만 그 가면은 세파 속에 내놓여진 약한 유리로서 인간은 언제 그것이 깨질지, 자신의 상처받고 갇혀있는 내면의 모습이 노출될지 두려워하며, 조심하며, 자신만의 세상 속에 포로의 모습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자신의 가면 속에 묻힌 본질적인 모습에 대해 대면하기를 두려워하며, 약한 영혼의 불꽃을 재 속에 덮어두게 된다.
             - 다음에 계속  -
                 

영화와 에니어그램 : 왕의 남자(3) 글쓴이 : KEEC   2018-06-27 10:07
왕의 남자 : King And The Clown, 2005
- 맹인 소극(笑劇) -


Main Themes: Clown, Fool, King, Play, 1:1.

왕의 남자는 이러한 유희의 정점에 서있는 유희를 통해 삶의 무료함을 바로보는 왕과 유희를 기본적인 삶의 생존의 수단으로 삼는 광대의 이야기이다.

어릿광대, 익살꾼, 바보
광대, 바보는 세속의 최고 권력자인 <왕>의 극단에 서 있는 존재이다. 바보, 어릿광대나 익살꾼은 궁정에서 가장 낮은 신분이며, 공양으로 드리는 희생양으로서 왕의 대역을 맡는다. 왕은 법과 질서의 힘을 상징하며, 어릿광대는 혼돈의 힘을 상징한다. 그래서 익살꾼이나 어릿광대는 제멋대로 말하거나 원하는 행동을 할 수 있다. 바보는 정신적으로 깨닫지 못한 인간으로 자기 앞에 어떤 미래가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맹목적으로 나락으로 빠져드는 인간을 나타낸다. 또한 신적 존재의 왕의 대속물로서의 공희를 드리는 제사장과 제물의 역할을 맡는다.


Blindness, Blindfolding 맹목성/ 눈가리개
맹목성과 눈가리개는 무지, 죄, 의무를 게을리 함, 빛과 바른 길을 찾을 수 없음, 분별력이 없거나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맹목적인 격정 激情’)을 나타낸다. 눈가리개를 하는 것은 속임수, 길을 잘못 듦을 나타낸다. 불교에서는 존재의 바퀴를 나타내는 눈먼 노파는 지식의 부재, 죽음에 이르는 무지몽매함을 나타낸다. 눈가리개를 한 큐피트는 세속적인 맹목성을 나타낸다. 눈이 먼 광대는 1:1 사랑에 눈이 먼 성적 하위유형의 모습을 상징한다.

이러한 눈이 멈 속에서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를 직면하였을 때 한가지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영화와 에니어그램 : 왕의 남자(2) 글쓴이 : KEEC   2018-05-26 15:17

영화와 에니어그램 : 왕의 남자(2)

왕의 남자 : King And The Clown, 2005
- 맹인 소극(笑劇) -
Main Themes: Clown, Fool, King, Play, 1:1.

이 영화에서 장생, 공길, 연산, 장녹수은 에니어그램의 모습 중에 생존본능을 사적이고 일대일 관계에 관심을 가지는 성적(개인적) 하위 유형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 따라서 그들은 보통 힘이 있고, 경쟁적이며, 집중적이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거나 적어도 관심을 받는 데 열중한다. 성적 하위 유형은 친근함을 추구한다. 그들은 자신이 사랑할 하나의 대상을 찾아다니며, 사랑할 대상, 영혼의 반려자를 갈구한다. 그들의 삶의 이슈는 친근감이고 관계 속에서의 연결에 대해 매달린다. 이들에게는 삶 속에서 에너지의 강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무엇을 내가 하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이러한 이들의 생존의 전략은 자기의 본능을 억누르는 금욕과 발산하는 난교이다.

이러한 성적·개인적 하위 본능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규정함에 있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용어와 만나게 된다.
Homo Ludens, 유희의 인간.
인간이란 존재를 규정함에 있어 사회과학에서는 '생각하는 동물'로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사회적·정치적인 동물'로서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도구를 사용하는 제작적 동물'로서 '호모 파베르(Homo Faber)', '직립 보행 혹은 의사 소통의 동물'로서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유희하는 동물'로서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네덜란드 문화학자인 호이징가는 이성과 사유가 아닌, 놀이나 유희가 인간의 문화를 형성해 왔으며, 놀이나 유희로 인해 인간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유희의 인간이라 불렀다. 호이징가는 우리가 오랫동안 문화에 있어서 놀이가 갖는 중요성을 간과해 왔다고 말하며, 사실, '놀 수 있다'는 것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생존을 위한 움직임은 기계적 물리법칙을 따르는 것일 뿐 이지만, '놀이'를 한다는 것은 물리법칙을 벗어난 그 이상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삶의 의미는 '놀이함'에서 나온다. 생존을 쫓아서 살아 간다는 점에 있어서 인간은 여타의 다른 생물들과 다를 바 없다. 생존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여가를 갖고 놀이할 때, 비로소 인간 삶의 독특한 의미가 생겨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문화는 놀이로부터 나왔으며, 또한 '놀아지는' 것이다(김성곤).

이러한 삶의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중 1:1의 강렬함을 원하는 성적 하위본능은 호모 루덴스의 모습과 같으며 동물적 인간이 보다 높은 경지를 향해 나아가려는 모습을 대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