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EC 소식지

에니어그램과 영화

HOME - KEEC 소식지 - 에니어그램과 영화
인사이드 아웃 - 소희정 전임교수 글쓴이 : KEEC   2016-02-25 10:53

내 머릿속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인공 라일리는 평화롭고 즐거운 일상이 펼쳐지는 고향 미네소타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온다. 미네소타는 쓰리엠의 도시인데 쓰리엠은 Minnesota Mining & Manufacture의 첫 글자를 모은 회사로 포스트잇을 만드는 전형적인 브릭스(bricks) 회사다. 브릭스는 브라질, 인도, 차이나, 남아공의 집합(set)이름이다.

 

라일리의 아버지는 제2의 인터넷 혁명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되고 그로인해 라일리가 겪게 되는 공간의 낯섦에 적응하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줄기이다. 샌프란시스코는 스포티파이(Spotify), 스퀘어(Square), 야머(Yammer)의 본사가 있고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의 본사가 있고 근처에는 그 유명한 실리콘밸리로 애플과 구글 등의 본사가 있다. 새로운 시대, 그 시대에의 적응은 12살 라일리에게도 적용이 된다. 그로인해 그간 쌓아 올렸던 우정, 가족, 정직 등의 가치를 상징하는 머릿속 섬들을 한 번에 붕괴시키고 새로운 섬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다섯 가지 감정과 만나게 된다. 이 다섯 가지 감정을 의인화하고, 추억, , 생각 등 머릿속 사고체계를 직접 눈에 보이는 세계로 구현한 기발한 상상력의 영화이다.

기쁨 |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라일리의 감정 컨트롤 본부의 대장으로 선택된 기쁨이는 오랜 기간 라일리의 삶을 주도하고 책임져왔다. 낯선 환경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 웃음을 선사하고 밝은 빛을 내며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한다.

 

슬픔 | “세상은 너무 슬퍼

파란 빛깔과 눈물이 거꾸로 된 모습에서 보이듯 잘 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라일리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여기며 자신의 존재 자체가 오히려 주변을 힘들게 한다고 여긴다. 우유부단하고 무슨 일이든 망설인다. 움직임이 느리고 무기력하다.

 

버럭 | “화가 난다 화가 나!”

일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누구든 자신을 얕잡아 보는 것 같으면 머리에서 불꽃이 나오며 버럭 화를 낸다. 참을성이란 찾아볼 수 없고, 쉽게 과민 반응하며 무슨 일이든 일단 화부터 내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존재이다.

 

 

까칠 | “어쩌라고?”

세심하지만 직설화법으로 세상의 모든 불만을 독선적으로 표현한다. ‘라일리가 전학 간 학교에게 만나는 친구들에게 기죽지 않도록 작년에 유행했던 패션 트렌드를 읽고 장소와 물건들을 매의 눈으로 바라본다.

 

소심 | “앉으나 서나 걱정이군

소심이의 주요 임무는 라일리가 새로운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위험한 것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것이다. 안절부절 눈만 뜨면 감시 모드로 들어간다.

 

이 영화에서는 인간의 감정 중 슬픔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슬픔이란, 감정의 정화 작용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론에서 카타르시스라는 감정의 배설을 말하고 있다. 누구나 원하는 기쁨으로만 성격이 구성된다면 이는 건강하지 않을 것이고 머리에 꽃을 꽂고 사는 것(광녀)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런 감정의 브레이크를 슬픔이 가지고 있다. 영화 초반부에 슬픔은 라일리에게 어떠한 도움이 되지 않는 무용지물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슬픔으로 라일리는 낯설고 비참한 상황을 극복할 힘을 되찾는다. 감정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양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우리는 다양한 감정을 통제되어야 할 대상으로서의 감정, 억압해야할 감정, 그래서 맘껏 발산해 버리고 싶은 감정으로 구분하여 인식한다. 어느 쪽이든 감정과 나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존재한다. 마치 미국이 백인, 흑인, 히스패닉 등이 다양성의 가치로 모여 있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우리의 행복은 기쁨과 슬픔, 그리고 까칠함과 버럭, 소심함을 포함한 수많은 감정들의 오케스트라가 선사하는 아름다운 선율인 것이다.

 

이기심이나 불만이나 슬픔 등 보여주고 싶지 않은 감정들은 오히려 진정한 자신을 알려주는 신호일 수 있다. , 보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 자신의 무의식 안에 존재하는 그대로의 감정도 우리의 참모습 중 하나인 것이다.

[#M_ more.. | less.. | 생각해보기_M#]

<생각해보기>

기쁨, 슬픔, 버럭, 소심, 분노의 감정 중에서 표현하기 어렵거나 다른 사람에게 안 보여주는 감정은 어떤 감정이고,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만약 감정과 만난다면 어떤 감정과 만나고 싶나요?


자신의 감정을 가족이나 타인들에게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프리다 - 소희정 전임교수 글쓴이 : KEEC   2015-12-29 17:21


“이보게 디에고,
우리는 결코 그녀처럼 그릴 수 없을 것이네.“
- PABLO PICASSO -



글 소희정 전임교수




아련한 기억 속에서만 섬처럼 둥둥 떠 있는 그리움의 대상들이 있다.
그들을 마음속에 내재한 살가움으로 불러일으켜주는 건 현재와 과거 때론 미래를 오가며 만나는 영화 속 장면이거나, 시간을 내어 전시장에 들려 바라보는 그림 한 점, 한 점 사이이다.
피카소도 극찬한 천재 여성 작가, ‘프리다 칼로’.

스크린을 통해서 아주 오래전에 만났던 그녀의 삶을 그림 앞에 오랫동안 앉아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세계 순회 전으로 구성된 ‘프리다 칼로’전이 우리나라 ‘소마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6살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가 불편했고, 18살 때는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서 살아있어도 살아있음이 아닌 고통을 감내하며 수십 번의 수술을 반복하여 삶을 살았던 프리다.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나 긴 병원생활의 무료함을 달래려 침대에 이젤을 부착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어떤 단어를 사용하여도 그녀의 아픔을 고스란히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육체적인 고통과 충격적 사건들로 인해 생겨난 상흔들을 그림으로 표현하며 자신을 보듬었던 건 아니었을까.

특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대면하면서 어떤 비장함을 가졌을 것이다. 커다란 구멍이 나고 균열이 난 삶의 상처를 보면서 비애감으로 채우기보다는 자신만의 희망으로 채웠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난 상처들을 보듬으며 외로움과 힘겨움이 이기고 견디기 위해 환상과 상상으로 희망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그림은 자신의 절절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란 점에서 감동이 증폭된다.

고통과 절망이라는 현실을 매혹적인 초현실적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그녀. 나아가 한 남자를 열렬히, 격정적으로 사랑했던 한 여성의 삶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영화 속에서의 프리다는 진취적이고 행동적이다. 사랑하는 남자 디에고를 향한 그녀는 당당하고 적극적이다. 어쩌면 지난날의 고통과 외로움을 이겨내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도 있었지만 고난을 승화시켰던 것은 이런 진취적이고 행동적이며 당당하고 적극적인 면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오로지 침대 위에서만 생활해야 했던 자신이 침대 밖으로의 삶은 그녀를 한층 자유로웠지 않았을까. 이런 그녀의 열정이 고스란히 자화상에 담겨있다. 그녀의 자화상 앞에서 보는 건 결국 나 자신이다.

프리다의 자화상은 그녀의 삶의 응고된 축소판이다. 소아마비, 교통사고로 평생 32번의 수술을 거치는 동안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침대는 자신만의 세계가 되었다. 모든 일상이 침대 위에서 이루어지고 자신만의 세계가 이 침대 위에서 만들어진다. 그녀의 자화상은 거울에 비친 자신이 아니라 고통과 절망 속에서 희망을 향해 가는 그녀만의 여정이지 않았을까.

우리의 인생을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사계절로 비유하거나, 마치 파도를 타는 것 같다고 한다. 마치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계절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이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칼날 같은 찬 기운이 쌩쌩 부는가하면, 파릇파릇한 싹이 돋아나기도 하고, 세상 모든 고통을 잠재우는 소담스러운 눈이 내리거나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어느 한 계절이 깊이 스며들 때가 있다. 소아마비와 교통사고로 인한 지루한 수술들, 프리다한테는 매서운 추위의 겨울이었을까. 침대에 이젤을 붙여놓고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보고 있는 봄이었을까. 연인을 열정적으로 사랑한 여름이었을까. 절망과 고통을 견디면서 그림을 그린 가을의 삶이었을까. 프리다, 당신은 어느 계절이 깊게 스며들었나요? 자화상에 담긴 당신의 진짜 마음이 궁금해졌습니다.




1.우리들의 인생을 사계절로 비유한다면, 지금 당신은 어떤 계절을 살고 있나요?

2. 프리다 칼로의 평생소원은 ‘디에고와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평생소원이 있다면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김씨표류기 - 글 / 소희정 전임교수 글쓴이 : KEEC   2015-11-19 14:56

김씨표류기

2009


글 소희정 전임교수




도심을 바로 앞에 두고 섬에 홀로 갇힌 남자 김씨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의 방에 갇혀 있는 여자 김씨.
남자 김씨는 여자의 바깥세상에 있고 여자 김씨는 남자의 바깥세상에 있다.
이들이 속해 있는 세상과 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정 반대이지만 이 둘에게 바깥세상은
두려우면서도 나가고 싶은 곳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죽고 싶었던 남자 김씨 |

살고 싶다는 욕망에 무릎을 꿇고, 모래사장에 쓴 HELP가 HELLO로 바뀌게 된다. 무인도에서 홀로 야생의 삶을 살아가도 괜찮다고 느낄 무렵에 익명의 쪽지가 담긴 와인 병을 발견하고
그의 삶은 알 수 없는 희망으로 설레기 시작한다.


컴퓨터를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는 여자 김씨 |
다른 사람들의 미니홈피에서 가져 온 사진이 마치 자신인 듯 사이버 세상에 올려놓고 댓글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세상에 낯선 모습이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이라 확신한 그에게 리플을 달아주기로 하고 3년 만에 자신의 방을 벗어나 야밤에 한강 밤섬에 와인 병을 던져주게 되는데 가상 세계에서만 살아가는 여자 김씨의 삶은 일종의 가짜의 삶 즉, 살아있지만 죽어 있는 삶이라는 것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렇게 한 평 방에 갇혀 있는 외톨이를 히키코모리라 할 수 있는데 도시에서 고립된 주인공 남자 김씨와 히키코모리인 여자 김씨는 소통 부재의 상태에 빠진 소외된 현대인들의 모습을 은유하고 있다.
인본주의 심리학자였던 매슬로우(Maslow)는 인간의 욕구는 타고난 것이고, 욕구의 강도와 중요성에 따라 5단계로 나뉜다고 하였다. 1단계 생리적 욕구, 2단계 안전에 대한 욕구, 3단계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 4단계 자기존중의 욕구,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영화 속 주인공 남자 김씨는 무인도에 불시착하자 인간의 욕구인 가장 1단계인 먹고 마시는 생존 욕구, 즉 짜장면을 만들어 먹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1차 욕구가 어렵게 충족이 되고 나니 오리 배라는 자신만의 집을 갖게 되고, 3단계의 욕구인 소속과 사랑받고 관심 받고 싶어 하는 소통 욕구까지 느끼게 되며 빈 오뚜기라고 적힌 깡통과 허수아비로 친구를 만들기도 한다. 옥수수를 따고 반죽을 해서 드디어 짜장면을 만들어 먹는 것을 통해 자아실현의 경험을 하게 된다.
영화<김씨 표류기>와 아주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캐스트 어웨이>가 있다. 주인공 톰 행크스는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불시착하여 4년을 홀로 지내게 되는데 이런 <로빈슨 크루소>류의 영화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피하고 싶은 것도 인간의 로망이고, 다시 사람들 속에 편입되고 싶어 하는 것 역시 인간의 로망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무인도에 불시착한 주인공 영화 속 김씨처럼 처음에는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리지만, 이것이 해결되자 배구공에 자신의 피로 얼굴을 만든 다음 윌슨이란 이름의 친구를 삼고 혼자서라도 스스로에게 소통을 하려고 한다. 아마 영화 김씨표류기가 아주 보편적인 인간을 상징하는 ‘김씨’라는 성을 쓴 것도 이러한 보편적인 인간의 동기와 그 위계, 그리고 그 위계를 통해 진화하는 인간의 모습에 관해 이야기하려 했던 것 같다.
남자 김씨가 붉은 사루비아 꽃을 맛보고 눈물을 흘렸을 때처럼 여자 김씨는 어느 집 담벼락 가로등불 아래 하얗게 피어있는 정체 모를 아름다운 붉은 꽃나무에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처음으로 엄마에게 말을 걸고, 인스턴트 옥수수 캔에 진짜 옥수수 씨앗을 심자 여자 김씨의세상이던 가상의 세계도 점차 진짜로 바뀌게 되고, 인스턴트 그린 자이언트 옥수수가 진짜 옥수수가 되고, 오뚜기 깡통 허수아비, 가짜 오리 같은 두 사람은 진짜 오뚜기처럼 진짜 백조처럼 다시 일어서게 된다.
결국 살아있다는 것은 호기심이 있다는 것이고 무엇인가 궁금해 질문한다는 것은 들숨과 날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도심 속 외계인과도 같았던 두 김씨는 어쩌면 우리네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을 블랙유머로 감싸 안은 것처럼 보인다. 김씨 표류기속 실날같은 타인과의 소통이야 말로. 지금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삶의 양식이 아닌가 여겨진다.

살아있다는 것은
파도처럼 끝없이 몸을 뒤집는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몸을 뒤집을 때마다
악기처럼 리듬이 태어나는 것이다.
-문정희의 ‘살아 있다는 것은’-


생각해보기
이 세상에서 단 한명과 소통이 가능하다면 누구와 소통을 하고 싶나요?
여자 김씨가 유일하게 창문을 여는 건 1년에 단 두 번, 세상이 멈추는 민방위 훈련 날인데, 내가 만약 여자 김씨라면 단 두 번 여는 세상에서 무엇을 보고 싶나요?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혼자 있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