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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에 흐르는 에니어그램의 정점 “지금 여기에...,” 2 (한진주) 글쓴이 : KEEC   2012-08-27 13:18

이 글은 한진주(진주심리상담원장)가 '에니어그램연구' 제 1권 2호. 한국에니어그램학회 에 게제한 글입니다. pp.125-138. 2004.



2. 본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들.

먼저, 영화 사랑의 블랙홀이다. 전체적인 삶을 놓쳤을 때, 그 일상의 반복은 계속된다는 이야기이다. 그 미칠 듯이 반복되는 일상은 그것을 알아차릴 때, 그때 사라진다. 진정으로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전체적인 삶을 살아야할 숙제가 아직 남아있기에, 다시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마치 윤회의 수레바퀴처럼,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릴 때는 우리가 그 일상에 100으로 있을 때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Here & Now" 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목적은 행복함이다. 그 행복을 경험하고, 실천하기 전 까지는 동일한 불행이 거듭 찾아오기 마련이나 반복되어지는 그 불행마저 행복의 메신저로 알아볼 일이다.

*영상 보기 1. 사랑의 블랙홀 중 각각 한 장면씩. 영상에 대한 약간의 나눔, 대화


두 번째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내용들을 살펴보자. 이 영화는 1965년 미국의 중부 아이오와에서 한때 교사였던 40대 중년의 한 주부, 프란체스카가 젊어서 가지고 있던 꿈을 고이 접어둔 채 하루하루 조용히 자족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그녀의 지루한 듯한 나날들은 생활속에서 이뤄보려고 하는 꿈과 희망과 교묘히 교차하며, 애써 맞춰보려고 노력하는 의사소통의 채널마저 자녀와도 남편과도 외면을 당한다. 충분히 전달하기도 전에 그저 양보하고 마는 그녀의 미숙한 2번적 성향 때문에,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내셔날 지오그래픽 표지에 실릴 다리를 찍기 위하여 워싱턴에서 온 사진작가, 로버트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동안 간직해 왔던 꿈과 호기심을 펼쳐 보인다. 먼저는 자기 자신 앞에서, 그리고 낮 설지만 다정한 이방인 앞에서, 짧은 일탈로 겪게 되는 사랑을 떠나보내고 그녀는 윤리적 규범 속에서 갈등과 혼란, 남겨진 자의 자리에서 겪어야할 그리움과 고독을 감춰가면서, 그녀의 4일간의 추억만을 간직한 채 여전히 그곳에서 남은 생을 보낸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프란체스카는 결혼으로 인하여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을 어루만지며, 내면에서 어쩌면 로버트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랑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험하더라도 스스로 선택하여 4일간의 사랑에 몰입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다시 제자리, 지난 시간들을 그 때보다 더 애절하게 그리워 할 수밖에 없는 삶이 남겨 진다. 그녀는 가족을 택하였지만 마음은 로버트를 향해있고, 마지막 생을 마감하면서 그 시간의 애절함을 가족에게 글로 남긴다. 그녀가 가족을 택한 것은 윤리적, 사회적 규범 속에서 본다면 맞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녀 자신에게는 현실이 아닌 꿈(로버트와의 사랑)만 남겨지는 미완성적 무거운 숙제가 되어 자신을 안으로 숨길 수밖에 없는 남은 날들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로버트와의 사랑을 선택하지 않은 것일까? 그녀는 끝없는 갈등과 두려움 속에서 진실한 사랑에 대한 확신과 그 사랑에 의한 실천적 용기를 내 보려고 많은 애를 썼을 것이다. 여기서 그녀에게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그녀가 매 순간마다 전적으로 자신을 위한 삶에 몰입할 수 없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전적으로 100 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어떻게 하여야 하였을까? 그녀의 삶의 정점은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미 잃어버린 그녀의 정점을 우리는 어떻게 찾아줄 수 있을까? 우주의 원리가 그러하듯이 한 생애를 마감하고 다시 반복되는 생애 속에서는 그녀의 사랑이 100을 이룰 수 있을까?? 에니어그램의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며 더러는 퇴행으로 균형을 잃고 흔들리는 순간순간 속에서 그녀는 어떻게 중심을 향하여 걸어갈 수 있을까? 그녀가 다 이루지 못한 “지금 여기”의 삶의 정점은 오늘날 우리들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되찾을 수 있을까?

우리 모두의 삶속에 프란체스카와 로버트가 반복되고 있다면 우리는 과연 그곳에서 “지금 여기”에 전적으로 100 이 되어 온전히 머물고 흐를 수 있어야 한다. 혹, 우리의 무미건조할 수 있는 인생의 과정에서 한줄기 소나기 같은 만남의 경험은 과연 우리에게 진실을 체험하게 할 수 있을까? 잠시 마음을 비우고 다가가 보자! 두려움은 소유 속에서 오고, 존재의 사랑은 비움과 나눔의 신비로 그 안에는 언제나 생명의100인 순간이 있다.

*영상 보기 2. 가족들과 시작되는 그날 아침 장면, 로버트와의 만남, 대화, 사랑, 그리고
떠남......, 자녀들에게 남겨둔 편지들 속에서......,

“4일 간...
하루도 그의 생각을 안 하고
살아간 적이 없었다.
그가 우린 하나라고 했던 말은
맞는 말이다.
우리 두 몸은 하나처럼
가깝게 느끼며 살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난 농장에 계속 남을 수 없었을 거야. “
-프란체스카-

“지금 작별인사를 하기는 싫소.
결정을 안 내려도 된다고.
마음이 바뀔 수 있어요.
다시 만났을 때 바뀌어 있기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하오.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소.
이렇게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단 한 번만 오는 것이오. “
-로버트 킨케이드-

"난 그 날의 침묵에 감사했다.
사랑은 예정된 게 아니라는 것,
알 수 없고 절대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로버트가 떠났어도
우리의 감정은 변할 수 없고
남편과 내가 이루었던 사랑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말하고 싶었다.
그와 떠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사랑의 아름다움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
-프란체스카-


여성에게 ‘결혼’과 ‘자아’는 공존하기 힘든 화두인가? 자기 삶의 주역이 되지 못한 채 주부로, 아내로, 엄마라는 조연(助演)으로 머물러야 하는 것이 숙명인가? 지금부터 약 반세기전에 앞서가며 고뇌하던 여인, 익숙한 일상과의 짧은 결별은 자기 자신이고 싶은 그녀의 진정한 욕망을 바라보게 하는 또 다른 변형을 향한 소중한 움직임, 그 경험을 그녀는 조용히 실천한 것이었을까?

그러면 이제 그녀의 전체적인 삶과 4일간의 삶을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녀의 4일간의 경험은 윤리의 부재인가? 사랑인가? 물론 이 작품 속에서는 이미 주인공 자신이 사랑임을 전하려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은행금고를 열어 본 후에
이 편지를 찾았겠지?
이런 편지는 참으로 쓰기 힘든 것이구나.
무덤까지 안고 갈 수도 있지만
인간은 늙어갈수록
두려움이 사라진단다.
자신을 알리는 일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져
이승에 사는 짧은 기간 동안
사랑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알리지 못하고 죽는 건
너무 슬픈 일인 것 같구나.
자식을 사랑하기는 쉽지만
자식이 부모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건 어떨지 모르겠다.
그의 이름은
로버트 킨케이드란다. “

이 영화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고백들을 듣는 동안 다시 일어나는 의문과 갈등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 삶속에서 윤리와 도덕, 철학의 자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개인적이거나 본질적 윤리관은 사회적 윤리관과 반대일 수도 있다. 사회가 요구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규범은 집단적 should 나 should not 일 수 있다. 본질적 윤리관은 철학을 동반하지만, 경험되지 않은 철학은 몽학선생일 뿐이다. 진정한 윤리와 철학이란 내 삶 그 자체이어야 한다. 삶이란 곧, 사실과 경험을 말한다. 그 행위의 좋고 나쁨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 전에 생겨있는 윤리와 도덕, 즉, 만들어진 신념체제의 변형, 그 경험을 통한 전체로의 성숙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쇼나 구르지예프 등은 사회적인 윤리와 철학을 철저히 반대하여왔다.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윤리와 도덕은 사회 운영방법론으로서의 한 방편이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구분해 놓고, 흑백 논리로만 성립할 수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와는 다르게 본질적 윤리와 철학은 나 개인이 나 자신의 성장과 조화를 위해 끝없이 선택하고 경험하는 것에 대한 허락과 통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두려움이나 비판이 따르지 않는다. 물론 사회적 윤리와 철학이 개인적 윤리와 철학을 수용할 수 있거나 개인의 경험과 성숙이 사회적 기준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더욱 아름다울 수 있겠지만, 그 둘은 어느 지점까지는 함께 설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 중간에서 갈등이 가장 많은 유형은 아마도 1번 날개만을 쓰는 2번 유형일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프란체스카가 2번 유형의 의식에서 자주 머문 것처럼.

그러면 남자 주인공 로버트는 어떤 사람인가? 직업적인 사진작가이나 틀에 박힌 기사가 쓰기 싫어 오직 작품(예술) 사진만 만들겠다고 고집하는 사람, 일 때문에 그리스에서 이태리를 지나다 창 밖으로 보이는 작은 마을(바리)이 너무 예뻐서 기차에서 무작정 내려 며칠을 머물다 가는 사람, 사랑하는 순간에 완벽히 몰입해 다른 아무것도 살피지 못하는 사람, 마지막까지 자신의 염원을 놓지 못하고 이상으로 승화시키려 침묵하는 사람, 감성에 정직하여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끝없이 떠도는 사람, 자, 이쯤하면 4번 유형들 손을 들게 되겠죠.
5번 날개를 쓰는 보헤미안, 물론 다른 의견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떠나자고 매달리는 4번 남자를 눈물로 감동시켜 혼자 보내고, 여전히 남아 지켜야하는 사랑의 수고와 고통을 없는 듯 잘도 감수하는 우리의 주인공 프란체스카는 2번 유형의 봉사자, 조력가이다.

사회적 윤리와 개인적 윤리 속에서 적나라한 그녀만의 사랑의 경험은 지금까지 가지고 살아왔던 그녀의 신념을 바꾸어 놓았다. 결혼 생활의 순수에 대하여, 자신의 꿈에 대하여, 막연한 동경에 대하여, 경험되어지지 않는 삶에 대하여, 가족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소유와 존재의 의미에 대하여, 좋게만 여겨왔던 마을 사람들에 대하여, 불륜의 소문으로 왕따가 되어있는 같은 마을 루시 부인에 대하여, (프란체스카는 결국 그녀의 친구가 된다.) 경험되어지지 않는 삶은 우리에게 변형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사회가 말할 때 불륜이라고 할 수 있으나 한 개인이 그 경험 속에 전체로 있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성숙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실이며, 순응이며, 완성을 향한 용기 있는 내 맡김이다. 에니어그램의 정점, 크리스탈 포인트는 지금 이 순간 이곳에 100 으로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번민도 갈등도 분열도 없이 그저 진실로 현존하는 것, 그 순간의 경험은 하나 됨이며, 통합이며, 영원함이다.

자신의 신념과 삶의 경험들, 개인적 윤리안의 느낌과 행동들은 본질의 소리인 자유와 깨어있는 의식에 각성을 준다. 답습되어지는 윤리와 철학이 아닌 진정한 경험을 통한 전체의식으로서의 100이 된다면 “지금 여기”에 온전히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남긴 사연들을 보는 아들과 딸의 반응을 보자. 처음에는 그 사실에 분노하고 정죄하지만 그 사연이 개인적(어머니로서가 아닌) 경험의 소중한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들 또한 자신의 아내와 남편을 찾아 생애 처음, 진정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실천적 경험을 한다. 그녀의 남김 없는 경험적 삶이 아직껏 막혀있던 그 자녀들의 에고(초기신념)의 벽을 헐고 두려움 없이 진실을 향해 뛰어들게 한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바라고 염원했던 그 순간 속에서 전체가 되는, 온전한 경험 속에서 진실이 되는 “지금 여기”를 대물림한다.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
그렇게 해주고 싶어.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아들, 마이클-

어머니의 아래와 같은 고백 있기에......,

“진심으로 너희를 사랑한다.
온 가슴으로,
너희들은 행복을 위해 노력하면서 살 거라.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단다.
잘 있어라, 나의 아이들아.”
-프란체스카-

당신은 어떤 꿈에서 살고 싶은가?
이제 우리가 “지금 여기”라는 삶의 구도자가 되어 일반적인 견해보다 좀더 깊이 들어가 연구해 보자. 사람이 2개의 꿈을 동시에 꿀 수는 없다. 둘 중 어느 하나의 꿈을 선택 하여야만 한다. 우리의 주인공 프란체스카가 그녀의 4일간의 사랑에 전체적으로 몰입하였다면 그것은 그것으로 완결되어야 한다. ‘내 삶의 마지막 재는 로즈먼 다리위에 뿌려달라.’고 유언한 것은 그 4일 이후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얼마간은 후회와 회한이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위하여 현실을 견뎌왔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그녀는 그녀의 삶의 순간순간 현재에 전체로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죽어서라도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자신의 희망을 걸어놓은 것이니, 마음은 수시로 미래로 떠나있고 현실은 비어있는 무덤처럼 더러는 공허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누구든 어느 한 쪽을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이 그때 100이었다면, 더 이상 미련이 없어야 한다. 깨어있음의 100으로 선택하였다면, 회한이 남을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자식과 남편을 선택했지만 자신의 염원은 언제나 그 연인 곁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 연인을 선택했다면 그 선택 또한 그녀의 고통이 되고, 간직하고 싶은 4일간의 사랑마저도 아무것도 아닌 한낱 굴레가 되는 그 두려움을 그녀는 알았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따로 라는 모순 속에 있으니, 역시 전체성과는 거리가 너무 먼 분열의 상태이다.

옳은가? 그른가?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녀의 선택이 전체적인가? 아닌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농부인 남편과 사진작가인 연인, 둘 중 하나를 선택하였다면, 그곳에서 그녀는 전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전적으로 전체적인 선택과 삶 안에서는 후회와 아쉬움(여한)이 남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항상 100으로 존재하기에 그 다음에도 여전히 100으로 있을 뿐, 이곳과 저곳이 다르지 않다. 전체적으로 살았을 때, 그 삶은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고, 옳은가, 그른가의 기준도 아니다. 그 순간 전체가 되었다는 것, “지금 여기”를 살고 있다는 것은 개인적 본성을 찾아가는 더 큰 비움으로 영원한 정점을 향하여 사랑으로 화답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정점이라고 오늘 우리는 공감하는 것이다.

“전적인 삶”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있을 때만 가능하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불행을 놓아버리라! 행복해지고 싶다면 먼저 불행을 붙들고 있는 그대의 손을 비우라. 그리고 그 손으로 행복을 잡으라. 그대의 손은 깨어있는 의식이다.

프란체스카, 그녀의 처음 윤리와 철학은 자신이 믿어왔던 것이지 그것이 삶이 된 것은 아니었다. 문제가 있는 이웃집 여자를 멀리하고, 자신의 삶을 지루함으로 견뎌내고, 자신을 감추며 봉사를 하고, 늘 막연한 동경과 불확실한 미래에 마음이 끌려 현실은 늘 그늘져있고, 그 그늘 속으로 더 들어가고자 가족과의 동행도 거절했던 것이다. 그 후 자신만의 진정한 경험이 생긴 후 그녀의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녀는 이웃집 여자, 루시 마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도덕적, 윤리적 틀 안에서의 신념은 간접적 사랑인 9개의 이해를 가져올 수 있지만, 개인적 경험을 통한 직접적 사랑으로서의 성숙은 10개의 완전한 이해가 실천되어지는 것이다. 100으로 삶이 전체가 되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녀가 현실에서 선택한 사랑은 그녀의 가족, 남편과 자식 이었다. 그 경험은 아름답지만 삶이 풍족한 쪽으로 그녀는 선택한 것이 아닐까? 그녀의 삶의 풍족이란 자기만의 삶이 아닌 가족의 삶을 함께 선택하는 것이었으리라. 아울러 그녀 자신만의 짧은 경험으로 그녀는 성숙한 삶으로 옮겨 갈 수 있었다. 비움과, 기다림과, 오래 참음으로, 비록 그녀의 인생의 전부를 바친 그곳에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을 묻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전체를 살려고 노력하였다.

“내 인생을 가족에게 바쳤으니, 내 마지막은 로버트에게 바치고 싶다.” -프란체스카-

그녀가 남긴 마지막 유언 한마디, 그 유언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녀는 자식에게 자신의 전 인생을 이야기한다.

자, 이제 우리는 ‘왜 불륜에 빠지는가?’ 의문하지 말고, ‘우리는 무엇을 경험해야하는가? 그리고 순간순간 어떻게 전체로 존재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질문하여야 하겠다. 우리도 삶속에서 끝없이 프란체스카가 되고, 로버트가 되고, 그녀의 남겨진 자식들이 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가야하기에 전체를 눈뜨고 깊이 바라보아야 하겠다. 지금 이 순간에 나는 누구를 살고 있는가?

"우리가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하는 것을 알기에
생활을 해 나가려 노력하지만
그러나...
카메라 렌즈에도
당신의 모습이 있고
기사를 쓰려고 시작하지만
결국 당신에게 글을 쓰게 되오.
이젠 알 수 있소.
우리가 나누었던
4일 간의 사랑을 간직하고
키워 나가기 위해,
당신이 그곳에 남아있음을"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사랑하는 연인의 선택을 존중해줌으로서 그 사랑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남자 주인공, 로버트, 그는 과연 전체로 살았을까?


다음 호에 결론으로 계속 합니다.
영화속에 흐르는 에니어그램의 정점 “지금 여기에...,” 1 (한진주) 글쓴이 : KEEC   2012-08-27 13:15

이 글은 한진주(진주심리상담원장)가 '에니어그램연구' 제 1권 2호. 한국에니어그램학회 에 게제한 글입니다. pp.125-138. 2004.

1. 서문; 들어가는 이야기

해마다 오는 가을이지만 이번 가을이 나에게 유난히 더 특별한 것은 아마도 지금 여기에 가장 가까이 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껏 에니어그램을 공부해 오면서 더욱 더 주변을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머물 수 있는 경험이 생겨났기 때문이리라.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바로 통합, 전체(wholeness)가 되어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이 전체의식 속에서 삶의 순간들을 맞이하고 다시 나누며 더 큰 전체를 향한 끝없는 나아감의 자리에 있기 위하여 오늘도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껏 에니어그램을 공부해 오면서 각 유형별 연구와 분석들을 거치고, 자신과 주변을 바라보면서 더 넓어진 이해와 성숙된 자신을 만들어 올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에니어그램의 학습 과정을 지나 삶의 과정인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에니어그램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지금 여기”를 화두로 삼아 영화속에 흐르는 에니어그램의 정점을 관찰해 보려고 한다.

우리는 이 에니어그램의 정점 “지금 여기”를 다시 Crystal point 라고도 부른다. 수많은 변화의 과정인 Turning point를 거쳐 비로소 도착하는 자리, Crystal point, 더 이상의 변화가 필요 없는 결정형의 무색투명함, 이 명료한 석영으로서의 원래 모습은 순수와 높은 정신의 상징으로, 그 속에 완벽한 우주가 자리 잡고 있다고 믿어, 우주의 진리를 깨닫는 표준이 되어지기도 하였다.

우리가 여기에서 그 수정의 결정(Crystal point)을 에니어그램의 정점, “지금 여기에...” 와 비유할 수 있는 것은 수정 역시 고도의 결정체로 탄생했다는 점이 에니어그램 속에서의 “지금 여기”라는 고도의 결정체와 뜻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그 정점, 그 결정의 자리, 그 자리를 영화라는 채널을 통하여 바라보면서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이야기 하며, 영상도 보고, 그 기운을 느끼고 나누어보려고 한다. 물론 에니어그램의 정점, “here & now” 는 인간사 어디에나 존재하고, 흐르고 있지만, 그중에 하나 영화속 순간순간에 들어있는 정점 “지금 여기”를 관찰하고, 바라보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별한 지혜의 혜택이기도하다. 그리고 일단 우리가 지금은 그 영화 밖에 있기 때문에 그 내용들을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시 우리들의 삶이 한편의 영화처럼 흘러갈 때 우리는 그 속에서 다시 영화를 보듯 우리의 삶을 관조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지금 여기에 100으로 있을 수 있는 소중한 명상적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본질적 욕망이 있다.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고 싶어 하는 욕망, 자기의 진수(본질)로 살고 싶은 욕망, 그 진수의 자리에서 또 영원하고 싶은 욕망, 부분이 아닌 전체로 살고 싶은 욕망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내제된 항상성 즉, 영원을 사모하는 신성의 본질의 의한 것으로 그 본질의 욕망을 어떻게 나의 삶속에서 이루고, 현상화시키고, 또 경험할 수 있을까? 그 의문에 한 발작 다가선 희망을 가지고 오늘 우리 함께 영화속으로 길을 떠나보자.

이제 우리 에니어그램의 정점에서 만나지는 이 특별한 가을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영화 속 그들의 염원을 들여다보자. Before sun rising, Before sun set. Groundhog Day, 50 First Dates, The Bridges Of Madison County 등... 그 속에서 그들이 그 순간에 전체로 있고 싶어 하는 염원은 과연 무엇으로 이룰 수 있을까?

위와 같이 오늘 여기서 함께 나누고 싶은 영화와 주제는 반복적 일상에서 오는 지루함을 어떻게 해서라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의도된 열망의 모습들이다. 그 안에는 자신도 알지 못하지만 지금 여기에 100(전체)이 되고 싶은 본질적 욕망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전체가 되어 “지금 여기”에 온전히 100으로 있을 때, 그때는 욕망의 번득임보다 사랑의 이완이 더 크게 느껴져 진실로 아름다운 본질의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는 신성한 아이디어가 들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첫 키스만 50번-50 First Dates, 해뜨기 전-Before sun rising 등의 영화속에서는 그냥 무심코 지나가는 시간들을 정말로 간절히 아쉬워하며, 그 순간 전체로 있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염원들이 들어 있음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물론 스치고 지나가지만 않는다면,


자, 이제 우리 한 가지만 동의 하고 넘어가자. 혹시 우리가 영화나 작품들을 볼 때, 우리의 에고 의식으로 곁눈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먼저 살펴볼 일이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단단한 신념의 체제는 진정한 경험만으로 수정될 수 있듯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변형되지 않고, 변화되기를 싫어하며, 왜곡된 자의식의 표출과, 전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면의 어떤 것들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나만의 필요, 소유, 나눔, 비판, 제한, 분노, 갈등, 인위적 단단함 등의 에고적 두려움을 잠시 내려놓아보자.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온전히 전체를 경험할 수 있는 열린 마음으로 시작해 보자. 에고는 전체를 느낄 수 없기에 끝없이 번민하고 방황하지만, 그 방황의 결국도 알아감이니 에고의 성함은 그만큼 본질의 소리에 애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잠시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 함께 에고의 변형을 허락해보자.

다음 호에 본론으로 계속 합니다.
'뷰티풀마인드'을 보고 (윤운성) 글쓴이 : KEEC   2012-08-27 13:14

뷰티풀마인드는 론 하워드 감독, 러셀 크로우 주연의 영화로 74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여우 조연상, 각색상 4개부분을 수상했다.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정신분열증상과 관련되어 있다.

이 영화는 존 내쉬라는 주인공을 통해 정신분열증의 고통을 그려내면서 우리와 같은 희망, 절망, 몸부림과 사랑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그려내고 있다. 어느날 술집에서 금발 미녀를 둘러싸고 벌이는 친구들의 경쟁을 지켜보던 존 내쉬는 번개같은 직관으로 '균형이론'의 단서를 발견한다. 실제인물의 삶을 주제로 천재인 존 내쉬가 '내쉬경제이론'으로 94년 노벨상을 받았지만 중요한 것은 삶과 연결되어 순수한 사랑과 러시아의 첩보기관원에 조정당하는 피해망상속에서도 가족을 지키려고 하는 주인공과 그 부인의 눈물겹고 헌신적인 사랑은 우리 주변에서 여타의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도록 한다.
정신분열증이 정신의학에서는 평생발병률이 1%의 흔한 병으로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조절이상으로 인한 뇌의 병으로 진단하고 있지만 어째든 에니어그램의 통합의 방향이 아닌 분열(건강하지 못한)의 방향에 있는 성격이상이라 할 수 있다.

영화속의 주인공인 존 내쉬는 독창성(original idea)과 기발한 수의 개념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지적이고 지나칠 정도의 분석적인 에니어그램 5번 유형이다. 5번이 건강할 때는 통찰과 독창성을 갖고 후퇴하지 않으면서 행동으로 옮겨 육체와 접하지만, 건강하지 않을 때는 병적이고 공포심에 휘싸여 후퇴하여 절망에 빠지게 된다(자의식으로는 내적질서, 행동방식으로 후퇴형). 이러한 상태는 모든 것을 머리와 사고로 문제를 해결하려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공포에 시달린다. 끝까지 아내에게 자신의 사적인 비밀을 가지고 고통을 받는다. 특히 5유형이 건강하지 않을 때 수준 7(isolated Nihilist)부터 미국의 정신장애 진단및 통계메뉴얼(DSM-IV)에서 말하는 분열형 성격장애(schizotypal)/분열성 성격장애(schizoid)가 발현된다. 즉 고립적이고 망상에 시달리며 결국 정신분열의 교란행동이 된다. 성격장애는 이처럼 경직되고 부적응적이며 심각한 기능의 저하나 주관적인 스트레스 상태의 원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현대의 심리학과 정신과의 연구가 에니어그램의 근거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심리학이 에니어그램과 마찬가지로 역동적인 유형론을 향해 직관적으로 진행되어왔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에니어그램은 DSM-IV(R)에 제시되어 있는 모든 성격장애와 신경장애를 조절할 수 있는 다축유형학이다. 더 나아가서 발달의 아홉 가지 수준의 연속체들에 대한 연구는 특성과 그 특성들이 병들었을 때 나타나는(성격장애) 상대적인 쌍들은 연속체들로 존재한다는 합리적인 가정을 증명한다. 이들 분야의 선두를 예견하는 현대 심리학자들의 연구 진행은 이미 에니어그램에 대해서 수행되어져 있다. 남은 것은 그것과 DSM-IV(다른 유형학) 간의 대응을 설명하는 것과 그들이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 있는 언어로 심리학자들에게 에니어그램의 잠재력을 전달하는 것이다.

주인공 존 내쉬의 병적이고 공포적인 망상의 근원은 머리중심의 근원적 고통인 불안(anxiety)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5번의 강박행동인 자아인색으로 풀리지 않는 우주세계에 대한 지나친 확인과 확증을 필요로하기 때문이다. 지나친 머리중심으로 에너지가 쏠려 힘의 균형이 깨지고 이것이 누적되어 5번의 최악의 발달수준 9로 떨어지게 된다. 건강을 위해서는 육체와 감정과 함께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이것이 삶의 균형이다. 즉 육체의 건강과 더불어 삶이 현실과 연결된 사랑과 감정이 교류되어야 한다. 주인공을 통해 본 5번의 성격장애로부터 에니어그램의 지혜를 깨닫게 한다.

마지막 노벨상 수상식연설에서 주인공은 " 내 인생이 소중한 발견은 어떤 논리와 이성으로 풀 수 없는 사랑의 방정식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당신덕분이고, 여기에 있고, 당신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이 모든 것 존재하는 것. 내 모든 존재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