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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검사 구입 및 검사영화속에 흐르는 에니어그램의 정점 “지금 여기에...,” 2 (한진주) 글쓴이 : KEEC 2012-08-27 13:18 |
이 글은 한진주(진주심리상담원장)가 '에니어그램연구' 제 1권 2호. 한국에니어그램학회 에 게제한 글입니다. pp.125-138. 2004. 2. 본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들. 먼저, 영화 사랑의 블랙홀이다. 전체적인 삶을 놓쳤을 때, 그 일상의 반복은 계속된다는 이야기이다. 그 미칠 듯이 반복되는 일상은 그것을 알아차릴 때, 그때 사라진다. 진정으로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전체적인 삶을 살아야할 숙제가 아직 남아있기에, 다시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마치 윤회의 수레바퀴처럼,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릴 때는 우리가 그 일상에 100으로 있을 때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Here & Now" 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목적은 행복함이다. 그 행복을 경험하고, 실천하기 전 까지는 동일한 불행이 거듭 찾아오기 마련이나 반복되어지는 그 불행마저 행복의 메신저로 알아볼 일이다. *영상 보기 1. 사랑의 블랙홀 중 각각 한 장면씩. 영상에 대한 약간의 나눔, 대화 두 번째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내용들을 살펴보자. 이 영화는 1965년 미국의 중부 아이오와에서 한때 교사였던 40대 중년의 한 주부, 프란체스카가 젊어서 가지고 있던 꿈을 고이 접어둔 채 하루하루 조용히 자족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그녀의 지루한 듯한 나날들은 생활속에서 이뤄보려고 하는 꿈과 희망과 교묘히 교차하며, 애써 맞춰보려고 노력하는 의사소통의 채널마저 자녀와도 남편과도 외면을 당한다. 충분히 전달하기도 전에 그저 양보하고 마는 그녀의 미숙한 2번적 성향 때문에,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내셔날 지오그래픽 표지에 실릴 다리를 찍기 위하여 워싱턴에서 온 사진작가, 로버트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동안 간직해 왔던 꿈과 호기심을 펼쳐 보인다. 먼저는 자기 자신 앞에서, 그리고 낮 설지만 다정한 이방인 앞에서, 짧은 일탈로 겪게 되는 사랑을 떠나보내고 그녀는 윤리적 규범 속에서 갈등과 혼란, 남겨진 자의 자리에서 겪어야할 그리움과 고독을 감춰가면서, 그녀의 4일간의 추억만을 간직한 채 여전히 그곳에서 남은 생을 보낸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프란체스카는 결혼으로 인하여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을 어루만지며, 내면에서 어쩌면 로버트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랑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험하더라도 스스로 선택하여 4일간의 사랑에 몰입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다시 제자리, 지난 시간들을 그 때보다 더 애절하게 그리워 할 수밖에 없는 삶이 남겨 진다. 그녀는 가족을 택하였지만 마음은 로버트를 향해있고, 마지막 생을 마감하면서 그 시간의 애절함을 가족에게 글로 남긴다. 그녀가 가족을 택한 것은 윤리적, 사회적 규범 속에서 본다면 맞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녀 자신에게는 현실이 아닌 꿈(로버트와의 사랑)만 남겨지는 미완성적 무거운 숙제가 되어 자신을 안으로 숨길 수밖에 없는 남은 날들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로버트와의 사랑을 선택하지 않은 것일까? 그녀는 끝없는 갈등과 두려움 속에서 진실한 사랑에 대한 확신과 그 사랑에 의한 실천적 용기를 내 보려고 많은 애를 썼을 것이다. 여기서 그녀에게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그녀가 매 순간마다 전적으로 자신을 위한 삶에 몰입할 수 없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전적으로 100 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어떻게 하여야 하였을까? 그녀의 삶의 정점은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미 잃어버린 그녀의 정점을 우리는 어떻게 찾아줄 수 있을까? 우주의 원리가 그러하듯이 한 생애를 마감하고 다시 반복되는 생애 속에서는 그녀의 사랑이 100을 이룰 수 있을까?? 에니어그램의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며 더러는 퇴행으로 균형을 잃고 흔들리는 순간순간 속에서 그녀는 어떻게 중심을 향하여 걸어갈 수 있을까? 그녀가 다 이루지 못한 “지금 여기”의 삶의 정점은 오늘날 우리들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되찾을 수 있을까? 우리 모두의 삶속에 프란체스카와 로버트가 반복되고 있다면 우리는 과연 그곳에서 “지금 여기”에 전적으로 100 이 되어 온전히 머물고 흐를 수 있어야 한다. 혹, 우리의 무미건조할 수 있는 인생의 과정에서 한줄기 소나기 같은 만남의 경험은 과연 우리에게 진실을 체험하게 할 수 있을까? 잠시 마음을 비우고 다가가 보자! 두려움은 소유 속에서 오고, 존재의 사랑은 비움과 나눔의 신비로 그 안에는 언제나 생명의100인 순간이 있다. *영상 보기 2. 가족들과 시작되는 그날 아침 장면, 로버트와의 만남, 대화, 사랑, 그리고 떠남......, 자녀들에게 남겨둔 편지들 속에서......, “4일 간... 하루도 그의 생각을 안 하고 살아간 적이 없었다. 그가 우린 하나라고 했던 말은 맞는 말이다. 우리 두 몸은 하나처럼 가깝게 느끼며 살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난 농장에 계속 남을 수 없었을 거야. “ -프란체스카- “지금 작별인사를 하기는 싫소. 결정을 안 내려도 된다고. 마음이 바뀔 수 있어요. 다시 만났을 때 바뀌어 있기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하오.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소. 이렇게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단 한 번만 오는 것이오. “ -로버트 킨케이드- "난 그 날의 침묵에 감사했다. 사랑은 예정된 게 아니라는 것, 알 수 없고 절대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로버트가 떠났어도 우리의 감정은 변할 수 없고 남편과 내가 이루었던 사랑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말하고 싶었다. 그와 떠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사랑의 아름다움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 -프란체스카- 여성에게 ‘결혼’과 ‘자아’는 공존하기 힘든 화두인가? 자기 삶의 주역이 되지 못한 채 주부로, 아내로, 엄마라는 조연(助演)으로 머물러야 하는 것이 숙명인가? 지금부터 약 반세기전에 앞서가며 고뇌하던 여인, 익숙한 일상과의 짧은 결별은 자기 자신이고 싶은 그녀의 진정한 욕망을 바라보게 하는 또 다른 변형을 향한 소중한 움직임, 그 경험을 그녀는 조용히 실천한 것이었을까? 그러면 이제 그녀의 전체적인 삶과 4일간의 삶을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녀의 4일간의 경험은 윤리의 부재인가? 사랑인가? 물론 이 작품 속에서는 이미 주인공 자신이 사랑임을 전하려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은행금고를 열어 본 후에 이 편지를 찾았겠지? 이런 편지는 참으로 쓰기 힘든 것이구나. 무덤까지 안고 갈 수도 있지만 인간은 늙어갈수록 두려움이 사라진단다. 자신을 알리는 일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져 이승에 사는 짧은 기간 동안 사랑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알리지 못하고 죽는 건 너무 슬픈 일인 것 같구나. 자식을 사랑하기는 쉽지만 자식이 부모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건 어떨지 모르겠다. 그의 이름은 로버트 킨케이드란다. “ 이 영화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고백들을 듣는 동안 다시 일어나는 의문과 갈등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 삶속에서 윤리와 도덕, 철학의 자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개인적이거나 본질적 윤리관은 사회적 윤리관과 반대일 수도 있다. 사회가 요구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규범은 집단적 should 나 should not 일 수 있다. 본질적 윤리관은 철학을 동반하지만, 경험되지 않은 철학은 몽학선생일 뿐이다. 진정한 윤리와 철학이란 내 삶 그 자체이어야 한다. 삶이란 곧, 사실과 경험을 말한다. 그 행위의 좋고 나쁨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 전에 생겨있는 윤리와 도덕, 즉, 만들어진 신념체제의 변형, 그 경험을 통한 전체로의 성숙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쇼나 구르지예프 등은 사회적인 윤리와 철학을 철저히 반대하여왔다.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윤리와 도덕은 사회 운영방법론으로서의 한 방편이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구분해 놓고, 흑백 논리로만 성립할 수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와는 다르게 본질적 윤리와 철학은 나 개인이 나 자신의 성장과 조화를 위해 끝없이 선택하고 경험하는 것에 대한 허락과 통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두려움이나 비판이 따르지 않는다. 물론 사회적 윤리와 철학이 개인적 윤리와 철학을 수용할 수 있거나 개인의 경험과 성숙이 사회적 기준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더욱 아름다울 수 있겠지만, 그 둘은 어느 지점까지는 함께 설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 중간에서 갈등이 가장 많은 유형은 아마도 1번 날개만을 쓰는 2번 유형일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프란체스카가 2번 유형의 의식에서 자주 머문 것처럼. 그러면 남자 주인공 로버트는 어떤 사람인가? 직업적인 사진작가이나 틀에 박힌 기사가 쓰기 싫어 오직 작품(예술) 사진만 만들겠다고 고집하는 사람, 일 때문에 그리스에서 이태리를 지나다 창 밖으로 보이는 작은 마을(바리)이 너무 예뻐서 기차에서 무작정 내려 며칠을 머물다 가는 사람, 사랑하는 순간에 완벽히 몰입해 다른 아무것도 살피지 못하는 사람, 마지막까지 자신의 염원을 놓지 못하고 이상으로 승화시키려 침묵하는 사람, 감성에 정직하여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끝없이 떠도는 사람, 자, 이쯤하면 4번 유형들 손을 들게 되겠죠. 5번 날개를 쓰는 보헤미안, 물론 다른 의견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떠나자고 매달리는 4번 남자를 눈물로 감동시켜 혼자 보내고, 여전히 남아 지켜야하는 사랑의 수고와 고통을 없는 듯 잘도 감수하는 우리의 주인공 프란체스카는 2번 유형의 봉사자, 조력가이다. 사회적 윤리와 개인적 윤리 속에서 적나라한 그녀만의 사랑의 경험은 지금까지 가지고 살아왔던 그녀의 신념을 바꾸어 놓았다. 결혼 생활의 순수에 대하여, 자신의 꿈에 대하여, 막연한 동경에 대하여, 경험되어지지 않는 삶에 대하여, 가족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소유와 존재의 의미에 대하여, 좋게만 여겨왔던 마을 사람들에 대하여, 불륜의 소문으로 왕따가 되어있는 같은 마을 루시 부인에 대하여, (프란체스카는 결국 그녀의 친구가 된다.) 경험되어지지 않는 삶은 우리에게 변형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사회가 말할 때 불륜이라고 할 수 있으나 한 개인이 그 경험 속에 전체로 있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성숙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실이며, 순응이며, 완성을 향한 용기 있는 내 맡김이다. 에니어그램의 정점, 크리스탈 포인트는 지금 이 순간 이곳에 100 으로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번민도 갈등도 분열도 없이 그저 진실로 현존하는 것, 그 순간의 경험은 하나 됨이며, 통합이며, 영원함이다. 자신의 신념과 삶의 경험들, 개인적 윤리안의 느낌과 행동들은 본질의 소리인 자유와 깨어있는 의식에 각성을 준다. 답습되어지는 윤리와 철학이 아닌 진정한 경험을 통한 전체의식으로서의 100이 된다면 “지금 여기”에 온전히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남긴 사연들을 보는 아들과 딸의 반응을 보자. 처음에는 그 사실에 분노하고 정죄하지만 그 사연이 개인적(어머니로서가 아닌) 경험의 소중한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들 또한 자신의 아내와 남편을 찾아 생애 처음, 진정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실천적 경험을 한다. 그녀의 남김 없는 경험적 삶이 아직껏 막혀있던 그 자녀들의 에고(초기신념)의 벽을 헐고 두려움 없이 진실을 향해 뛰어들게 한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바라고 염원했던 그 순간 속에서 전체가 되는, 온전한 경험 속에서 진실이 되는 “지금 여기”를 대물림한다.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 그렇게 해주고 싶어.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아들, 마이클- 어머니의 아래와 같은 고백 있기에......, “진심으로 너희를 사랑한다. 온 가슴으로, 너희들은 행복을 위해 노력하면서 살 거라.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단다. 잘 있어라, 나의 아이들아.” -프란체스카- 당신은 어떤 꿈에서 살고 싶은가? 이제 우리가 “지금 여기”라는 삶의 구도자가 되어 일반적인 견해보다 좀더 깊이 들어가 연구해 보자. 사람이 2개의 꿈을 동시에 꿀 수는 없다. 둘 중 어느 하나의 꿈을 선택 하여야만 한다. 우리의 주인공 프란체스카가 그녀의 4일간의 사랑에 전체적으로 몰입하였다면 그것은 그것으로 완결되어야 한다. ‘내 삶의 마지막 재는 로즈먼 다리위에 뿌려달라.’고 유언한 것은 그 4일 이후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얼마간은 후회와 회한이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위하여 현실을 견뎌왔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그녀는 그녀의 삶의 순간순간 현재에 전체로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죽어서라도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자신의 희망을 걸어놓은 것이니, 마음은 수시로 미래로 떠나있고 현실은 비어있는 무덤처럼 더러는 공허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누구든 어느 한 쪽을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이 그때 100이었다면, 더 이상 미련이 없어야 한다. 깨어있음의 100으로 선택하였다면, 회한이 남을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자식과 남편을 선택했지만 자신의 염원은 언제나 그 연인 곁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 연인을 선택했다면 그 선택 또한 그녀의 고통이 되고, 간직하고 싶은 4일간의 사랑마저도 아무것도 아닌 한낱 굴레가 되는 그 두려움을 그녀는 알았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따로 라는 모순 속에 있으니, 역시 전체성과는 거리가 너무 먼 분열의 상태이다. 옳은가? 그른가?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녀의 선택이 전체적인가? 아닌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농부인 남편과 사진작가인 연인, 둘 중 하나를 선택하였다면, 그곳에서 그녀는 전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전적으로 전체적인 선택과 삶 안에서는 후회와 아쉬움(여한)이 남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항상 100으로 존재하기에 그 다음에도 여전히 100으로 있을 뿐, 이곳과 저곳이 다르지 않다. 전체적으로 살았을 때, 그 삶은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고, 옳은가, 그른가의 기준도 아니다. 그 순간 전체가 되었다는 것, “지금 여기”를 살고 있다는 것은 개인적 본성을 찾아가는 더 큰 비움으로 영원한 정점을 향하여 사랑으로 화답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정점이라고 오늘 우리는 공감하는 것이다. “전적인 삶”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있을 때만 가능하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불행을 놓아버리라! 행복해지고 싶다면 먼저 불행을 붙들고 있는 그대의 손을 비우라. 그리고 그 손으로 행복을 잡으라. 그대의 손은 깨어있는 의식이다. 프란체스카, 그녀의 처음 윤리와 철학은 자신이 믿어왔던 것이지 그것이 삶이 된 것은 아니었다. 문제가 있는 이웃집 여자를 멀리하고, 자신의 삶을 지루함으로 견뎌내고, 자신을 감추며 봉사를 하고, 늘 막연한 동경과 불확실한 미래에 마음이 끌려 현실은 늘 그늘져있고, 그 그늘 속으로 더 들어가고자 가족과의 동행도 거절했던 것이다. 그 후 자신만의 진정한 경험이 생긴 후 그녀의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녀는 이웃집 여자, 루시 마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도덕적, 윤리적 틀 안에서의 신념은 간접적 사랑인 9개의 이해를 가져올 수 있지만, 개인적 경험을 통한 직접적 사랑으로서의 성숙은 10개의 완전한 이해가 실천되어지는 것이다. 100으로 삶이 전체가 되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녀가 현실에서 선택한 사랑은 그녀의 가족, 남편과 자식 이었다. 그 경험은 아름답지만 삶이 풍족한 쪽으로 그녀는 선택한 것이 아닐까? 그녀의 삶의 풍족이란 자기만의 삶이 아닌 가족의 삶을 함께 선택하는 것이었으리라. 아울러 그녀 자신만의 짧은 경험으로 그녀는 성숙한 삶으로 옮겨 갈 수 있었다. 비움과, 기다림과, 오래 참음으로, 비록 그녀의 인생의 전부를 바친 그곳에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을 묻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전체를 살려고 노력하였다. “내 인생을 가족에게 바쳤으니, 내 마지막은 로버트에게 바치고 싶다.” -프란체스카- 그녀가 남긴 마지막 유언 한마디, 그 유언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녀는 자식에게 자신의 전 인생을 이야기한다. 자, 이제 우리는 ‘왜 불륜에 빠지는가?’ 의문하지 말고, ‘우리는 무엇을 경험해야하는가? 그리고 순간순간 어떻게 전체로 존재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질문하여야 하겠다. 우리도 삶속에서 끝없이 프란체스카가 되고, 로버트가 되고, 그녀의 남겨진 자식들이 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가야하기에 전체를 눈뜨고 깊이 바라보아야 하겠다. 지금 이 순간에 나는 누구를 살고 있는가? "우리가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하는 것을 알기에 생활을 해 나가려 노력하지만 그러나... 카메라 렌즈에도 당신의 모습이 있고 기사를 쓰려고 시작하지만 결국 당신에게 글을 쓰게 되오. 이젠 알 수 있소. 우리가 나누었던 4일 간의 사랑을 간직하고 키워 나가기 위해, 당신이 그곳에 남아있음을"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사랑하는 연인의 선택을 존중해줌으로서 그 사랑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남자 주인공, 로버트, 그는 과연 전체로 살았을까? 다음 호에 결론으로 계속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