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詩>를 보고…
이 과제를 받고 나를 잘 나타낼 수 있는 영화가 어떤 게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심화단계까지는 1번 유형으로 참여하여 1번 유형이 잘 드러나는 인물의 영화를 찾느라 고민했는데 최근에 에니어그램을 공부하는 팀들과 스터디를 하면서 다시 유형 검사를 해봤더니 4번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문득 떠오른 영화가 이 영화다.
내 주변 사람들도 나를 딱 보면 누가 뭐래도 4번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나 역시 4번이 나의 본질적인 모습일 것으로 생각한다.
에니어그램을 공부하면서 아직은 몇 편의 영화밖에 분석해보지는 않았지만 영화는 감성이 풍부한 예능인들이 만든 것이어서 인지 많은 영화들이 4번 유형으로 흐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4번 유형의 색깔이 물씬 풍겨나고 문학에 관
심이 많은 나와 주인공의 내면에 지닌 감성들이 닮은 점이 많다.
이제 이 영화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4번 유형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詩>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다.
이 영화는 아이들이 자연학습 관찰을 하는 어느 강가의 장면과 함께 강물위로 한 소녀의 주검이 떠내려오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그 주검의 실체는 동급생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후 자살한 10대 소녀다.
그 주검과 영화의 제목 ‘시’가 보이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감독이 던지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무척이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예쁘게 꾸미길 좋아하는 시적인 감수성을 갖고 살아가는 66세의 ‘양
미자’다. 그녀는 이혼한 딸이 맡겨놓은 중학교 3학년인 외손자와 생활보호대상자로 어렵게 살아가며 거동이 불편한 어느 회장의 간병 일을 한다.
그녀는 어느 날 문화원에서 시 쓰기 강좌 수강신청을 하고 시문학 강의를 들으며 시인이
되는 꿈을 갖는다. 그녀는 시를 잘 쓰기 위해 세상을 보는 방법, 즉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는 방법을 배워나간다.
이 영화는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주인공 ‘미자’가 어떻게 한 편의 시를 완성하며 맞닥뜨
려진 삶의 문제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며 살아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제 4번 유형의 특징을 반영하는 부분을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한다.
주인공 미자는 팔이 저릿저릿하다며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나오다가 응급실 쪽에서 혼이 나간 듯 맨발로 왔다 갔다 하며 슬픔에 못 이겨 혼잣말을 하는 어떤 어머니를 목격하게 된다. 바로 성폭행으로 죽은 소녀의 엄마다.
미자는 그 광경을 보고 무심코 지나치지 못하고 충격과 연민의 감정으로 심각하게 지켜본다. 4번 유형은 남의 아픔이나 슬픔에도 쉽게 감정 이입이 되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특히 죽음이나 고독, 슬픔 등 깊고 어두운 감정에 더 관심을 보이고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그녀는 간병을 하는 회장의 딸이 계산원으로 일하는 슈퍼마켓에 들렀다가 그 소녀의 자살 소식을 들려주자 회장 딸은 자기 일만 하며 들은 체 만 체 아무런 반응도 없다. 집으로 돌아와 손자 종욱에게도 그 소식을 전하자 손자도 듣는 둥 마는 둥이다.
우리 이웃이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슬픈 일들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의 표정이 주인공 미자의 성품과 대비되어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이웃이나 남의 일에 너무나 무관심하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따뜻한 정서가 메말라가는 인간성 상실의 문제를 자각하게 된다.
4번은 남의 아픔이나 슬픔을 보아도 그 감정이 가슴에 오래 머무는 편이다.
영화 전반부에 친구와의 전화 통화에서 그녀는 “내가 시인 기질이 좀 있지. 꽃도 좋아하고. 이상한 소리도 잘 하고...”라는 말을 한다. 4번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감수성이 풍부하다.
이 영화에서 4번의 깊고 섬세한 감성을 표현한 대사는 영화 말미에 미자가 희진의 어머니를 찾아간 대사에서다. 그녀는 청아한 새소리가 들리는 시골길을 걸으며 시골 풍경의 감성에 푹 젖어 들어 감동에 충만한 표정으로 희진 엄마에게 말을 한다.
“아까 살구가 떨어진 걸 보고 참 간절하다 생각했어요. 살구는 자기 몸을 땅에 던져 다음 생을 준비하잖아요?내가 평생 살아도 오늘 살구에 대한 그런 거 처음 알았네.호호.또 살구 나무 옆에는 백일홍도 있고.백일홍 꽃이 얼마나 예쁘게 떨어져요?오면서 이런 데 걷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다 싶더라구요. 난 꽃을 너무너무 좋아해서 보고 있기만 해도 행복해요.꽃만 바라보고 있어도 배가 불러서 밥 안 먹어도 돼요. 호호…” 이 대사는 4번 유형의 섬세하고 깊은 감성이 잘 드러난 표현이다. 4번 유형은 감성이 풍부하다 보니 사소한 것에서도 감동을 잘 받으며 꽃이나 사물에게도 말을 걸며 정서적 교감을 나눈다.
죽은 소녀의 어머니를 만나 합의하자는 설득을 하고 와야 하는데 시골 풍경의 자연 속에
동화되어 시적인 감성에 젖어 든 말만 하고 돌아오다가 아차 싶어한다.
알츠하이머 증세가 있다는 진단을 받긴 했지만 감성에 젖어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감정 통제가 어려울 수도 있는 4번 유형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성격은 에니어그램의 역동성이 말하듯 그 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건강할 수도
있고 불건강 할 수도 있다. 즉 이성과 감성의 조절, 또는 에너지를 사용하는 힘의 조화
가 깨지거나 균형을 잃을 때가 있다.
이 영화에서 미자의 발달 수준은 양심과 현실 문제 해결 사이에서 갈등하는 보통 수준으
로 보인다.
어느 날 그녀는 시문학 강좌를 신청하고 듣게 되는데 시를 잘 쓰고 싶은데 도무지 시
상이 떠오르질 않아 고민이다.
그녀는 일상에서도 시상을 찾고 시 낭송회도 찾아가고 늘 수첩과 연필을 들고 다니며 자
연이나 사물을 관찰하며 떠오르는 시상을 메모한다.
어떻게 해야 시를 잘 쓸 수 있는지 시 강좌 시간에 열심히 듣고 질문도 해보지만 시인
강사의 대답은 모호하기만 하고 시를 쓰는 것이 그녀에겐 어렵기만 하다.
어려운 현실에서도 쫒기며 살거나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4번이 지닌 풍부한 감성
과 서정성을 문학으로 승화시키며 살려는 노력이 아닌가 싶다. 그녀는 영화 말미의 시
낭송회에서 어떤 낭송인이 여담으로 좀 야한 말을 하자, 시를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찾는 것인데 맨날 저런 와이당이나 하고 꼭 시를 모독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고상함을 추구하는 4번 유형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4번은 교양 있는 말이 아
닌 세속적인 말이나 야한 농담을 즐겨 하는 사람을 천박한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그녀는 문학강좌를 신청하러 가서 수강 신청이 마감되었다는 직원의 말에도 바로 포기하지 않고 꼭 듣고 싶어 그렇다며 그래도 좀 받아줄 수 없느냐고 애교 섞인 부탁을 해본다. 결국 수강 신청을 받아낸다. 하고자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의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임하는 태도는 4번 유형의 건강한 수준의 행동이다.
어느 날 밤, 손자 친구 5명이 집으로 들이닥치고 그들이 문을 잠그고 소곤대는 대화에 이상한 느낌이 들자 문을 열어 배고프지 않느냐고 하면서 사과를 깎아줄까 하자 손자는 짜증난 얼굴로 할머니에게 귀찮게 왜 그러느냐며 문을 쾅 닫는다. 손자는 무력감에 빠져 공부에는 관심도 없고 태만하며 대답하는 것도 귀찮아 한다.
그래도 미자는 손자의 퉁명스런 대답이나 짜증 섞인 말에 화를 내지 않는다. 딸이 맡긴 외손자에게 자기 삶이 버거우면 투사를 하여 화를 내는 경우도 있을 법 하지만 무경우하게 분노하거나 화풀이를 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것으로 보아 미자는 건강한 수준의 4번 유형임을 알 수 있다.
어느 날 손자 친구 기범이 아버지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갔다가 죽은 소녀의 성폭행 사실에 손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은 소녀의 학교에서도, 성폭행을 저지른 아이들의 부모들도 모두 그 사실이 확장되지 않고 더 이상 새나가지 않게 쉬쉬하며 6명이 합의금 3000만 원을 마련하여 마무리 하려 한다. 미자는 죄책감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마음이 복잡해지고 1인당 부여된 500만 원을 만들 길이 없어 막막해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자는 자살한 소녀의 위령 미사에 참석하고 죽은 소녀 박희진의 사진을 몰래 가져온다.
그녀는 희진이 성폭행 당했던 곳과 희진이 자살한 곳까지 찾아가 보고 그녀의 고통에 슬
픈 연민을 보낸다. 한 소녀가 성폭행을 당해 죽음으로 맞섰어도 세상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도 잘 안 느끼는 것에 비해 미자는 죄책감을 느끼며 그녀의 죽음을 아파하고 위로한
다.모든 사람에게 양심은 있지만 4번은 어느 유형보다 선악에 민감하고 감성이 여리어
남에게 피해주는 행동을 못 하고 천성적으로 착하며 연민이나 동정심을 잘 느끼며 죄책
감에 더욱 시달리는 편이다.
미자는 희진이가 강물에 몸을 던졌던 곳을 다녀온 후 자신이 간병을 하던 몸이 불편한 회장에게 비아그라를 먹이고 성관계를 한다. 합의금을 마련할 길이 없던 미자는 나중에 회장을 찾아가 이유는 묻지도 말고, 이 돈은 갚지도 못할 돈이니 500만원 만 달라고 요구 한다. 이 행위는 합의금 마련과 윤리 의식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며 문제 해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행동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주인공의 하위유형이 SP임을 말해준다.
영화 말미에서 미자는 ‘아네스의 노래’라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
‘아네스’는 16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성폭행 피해로 자살을 한 소녀 박희진의 세례명이다.
즉 아네스를 위한 애잔한 시를 완성한 것이다.
이 시는 미자의 목소리로, 이어서 죽은 소녀의 목소리로 나즈막히 들려준다.
미자는 시 강좌 마지막 날, 강사님께 꽃다발을 한아름 놓아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녀가 죄책감에 시달려 자살을 했는지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 사라짐은 어떤 의미인지 우리 모두가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전체적인 흐름까지 4번 유형의 특징이 많이 드러난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원망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외손자를 돌보며 꿋꿋이 살아가는 미자의 모습이 아름답다.
오늘날 점점 시가 외면 당하고 있고 시가 죽어가는 사회란 곧 인간의 아름다운 정서가 점점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이 영화는 그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오랜만에 감동이 있는 영화 ‘시’를 감상하면서 긴 여운을 안고 여기서 마무리 한다.
- 10기 전문강사 이정자